노래앨범이 없는 우즈벡 공훈가수 신갈리나
노래앨범이 없는 우즈벡 공훈가수 신갈리나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5.10.14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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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 고려인 동포, 한국을 찾다
고려인마을, 담양대나무축제 등 관람
김규면 장군 후손 박안나, 한국 살고 싶다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들의 고려인 후손들이 조국인 대한민국을 찾았다.
이번 방문은 광복70주년을 맞아 고려인 동포 지원단체인 사단법인 고려인돕기운동본부(대표 이광길)와 고려인문화농업교류협력회(회장 오채선)의 초청으로 이뤄지게 됐다.
지난 11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들은 광주로 내려와 숙박한 후 광주 고려인마을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담양 대나무축제 등을 관람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독립유공자 고려인 후손들이 12일 고려인마을을 찾았다.
광주에서 일정이 있었던 12일, 점심을 먹고 난 후 이들은 전국적으로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광산구 고려인마을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로 향하는 길에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인 김알라 씨와 아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알라 씨.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알라 씨의 어머니는 홍범도 장군의 셋째 딸이다. 그녀는 한국 땅을 밟은 기분을 묻자 서툰 한국말로 “너무너무 반갑고, 슬프다”며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읊조렸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지원센터에 도착하자 고려인마을의 이천영 목사와 신조야 지원센터장이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이들 모두는 황토화덕에 구운 밀가루빵, 우유에 견과를 으깬 죽, 말린 과일 등 고향음식을 나눠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참 담소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 러시아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우즈베키스탄 공훈가수 신가리나 씨가 시작을 끊었다. 독립운동 당시 선조들이 불렀다는 러시아 민요 ‘카츄샤’였다. 다른 고려인들도 신가리나 씨를 따라 목청을 높여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의 리듬은 경쾌했다. 어쩌면 이들이 흥겨운 목소리로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기자는 이 노래의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마냥 즐거운 노래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후에 찾아보니 전장으로 나가는 애인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여인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고려인마을지원센터를 찾은 고려인 동포들은 신갈리나 씨를 필두로 다같이 러시아 민요 '카츄샤'를 열창했다.
할머니들이 노래하고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동안 박안나 씨는 구석에 조용히 서서 그런 모습들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박안나 씨는 김규면 장군의 4세 손이다. 이야기를 나눠보기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자라고 밝히고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물었다.

▲박안나 양. 김규면 장군의 4세손.
그런데 그녀가 주섬주섬 메모지를 꺼내더니 거기에 적혀 있는 김규면 장군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동안 수많은 기자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고, 또 똑같은 대답을 수없이 해서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박안나 씨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박안나 씨, 아니 박안나 양이라고 해야 맞겠다. 안나 양은 꽃다운 나이 스물한 살이고, 한국말도 꽤 유창하다. 그녀는 한국과 한국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아이유를 좋아한다고 했다. 안나 양은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연세대학교 어학당에 유학 중이에요”라며 “한국 좋은 것 많아요. 사람들도 친절하고, 특히 아이유를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한국에 온지는 2년 반이 됐다. 사실 이번 초청도 할머니가 왔어야 하지만 너무 연로하고,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못해 안나 양이 대신 참석하게 됐다. 안나 양의 할머니가 5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김규면 장군이 할머니를 챙겼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해 여기 살고 싶다

안나 양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한국에 관심이 많아 바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공부하고 있다.
혹시 한국에서 지내면서 불편한 것 없느냐는 질문에 “불편한 것 없이 다 좋아요. 사람들은 친절하고 편해요”라며 “열심히 (공부)해서 통역 일을 하면서 여기에 살고 싶어요”라고 자신의 꿈을 밝혔다.

지원센터 방문 후 이들은 다음 일정인 담양 대나무축제를 관람하기 위해 출발했다. 기자는 이후 이들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숙소에서 우즈벡의 공훈가수 신갈리나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신갈리나 씨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견뎌내고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공훈가수 칭호를 받은 유일한 고려인이 됐다.

그녀는 사실 이번이 첫 방문은 아니다. 1988년 올림픽 당시 개인적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다음 해인 1989년 세계 한민족 축전에 가수로서 방문했다. 1991년도에는 소련의 유명한 연예인들 98명이 한국을 방문했었는데 그때 신갈리나 씨도 함께 했었다.
이번 방문은 그녀가 1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것이다. 10년 전, 한국노래와 팝송 분야에서 콩쿠르를 열고, 1등한 가수는 반드시 한국에 보내달라고 대사관에게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콩쿠르에서 1등한 가수와 미스 고려인 우즈베키스탄 등 신갈리나 씨를 포함 4명이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유일한 고려인 공훈가수 신갈리나 씨는 제자들을 위한 녹음실 차려주는 것이 남은 생의 꿈이다.
신갈리나 씨는 26살에 상을 받아 공훈가수가 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인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없었던 일이었다. 갈리나 씨는 “이제 쉰 살이 넘어서 인정받았다. 고려인으로서 너무 힘들게 오다보니 지쳤다”며 “나는 이미 가질 것 다 가졌다. 다만 우리의 언어와 문화, 예술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는 자신들이 못 가본 고국 땅에 꼭 가봤으면 좋겠다고 항상 말씀하셨다”며 “교포들을 만나고 아버지 생각이 나 눈물이 올라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 기회가 정말 고려인을 위해 다들 고생한다는 고마운 마음이 든다. 열심히 애쓴 다른 고려인들도 고국 땅을 왔다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제자 위한 녹음실 차려주는 것 ‘꿈’

갈리나 씨는 부모님이 죽고 동생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녀는 동생들을 돌보느라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갖지 못했다. 갈리나 씨는 “아버지가 74년에 돌아가시고, 6년 안에 어머니, 큰오빠, 작은오빠, 큰언니가 돌아가셨다”며 “조카 13명을 내가 다 키웠고, 우리 집안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젊을 때 의사가 나는 아이를 못 가진다고 해서 이것이 내 운명이구나 하고 받아들였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손자 9명이 너무 빨리 커서, 좀 천천히 크라고 말한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녀의 앞으로 남은 생의 마지막 꿈은 제자들을 위해 조그만 녹음실이라도 하나 차려주는 것이다. 갈리나 씨는 “아이들이 새 노래를 부르려면 2년에 1번씩만 녹음할 수 있다. 2년 동안 돈 모아서 1번 녹음하는 것이다”며 “저는 공훈가수라고 하지만 앨범이 없다. 돈이 생기면 다 아이들에게 써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에 올 때마다 녹음기 쓰던 것이라도 좋으니 고려인들이 녹음기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이곳저곳에 부탁한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 고려인의 문화, 언어, 전통이 다 끝나는 것이다”며 “(고려인의 전통과 문화를) 살리려고 애써봤지만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후원해주지 않는다. 아이들에겐 기다려달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노래를 배우러 온 아이들이 한국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노래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만큼 고국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녀의 바람대로 고려인 아이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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