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8)
무등을 돌다(8)
  • 이종범 조선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15.10.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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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화암동 운암서원에서 임진의병사의 길목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송제민과 학술과 경륜을 펴지 못하고 세상 떠난 선비 송정황을 되새겼습니다. 조금 길을 오르면 충민사(忠愍祠)입니다.

1627년(인조 5) 정월, 동방의 새로운 강자 후금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왔을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순국한 전상의(全尙毅) 장군을 모신 사당입니다. 경내는 넉넉하고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정려각이 있고 영정도 갖췄으며 유물관의 안주성전투도가 실감납니다.

아련합니다. 잣고개 전망대에서 장원봉 올라 화암동으로 내려오다가, 전두환이 천안 전씨 일가라고 선심 썼고 그의 아우 전경환이 다녀갔다는 소문이 있어 거들떠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감히 장군을 욕보이는구나, 그땐 정말 화가 치밀었지요.

장군은 1575년, 그간 세상을 움켜쥐었던 외척권신이 물러나고 사림정치가들이 정국을 이끌 때에 태어났습니다.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할 때였습니다. 동양이 전통적 법은 붕당을 죄로 다스렸습니다.

왕권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녕 왕권을 우습게 만들고 약화시킨 장본인은 외척권신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임금을 앞세우는 것 같지만 실상을 보면 만백성을 살려야 하는 임금의 권한과 책임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외척공신의 임금 섬김, 사군(事君)은 임금을 끼고돌며 내세우는 협군(挾君)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신영달과 일가보신을 위하여 임금을 차지하려고 다투었을 뿐입니다. 다산 정약용을 이런 부류를 쟁왕지인(爭王之人)이라고 하였습니다. 쟁왕! 품고 있는 뜻이 절묘합니다.

이런 점에서 임금의 잘못을 끊임없이 고치려들며 임금을 공도(公道)의 경지로 인도하고자 하였던 선비정치가야말로 진정한 임금 높임, 존왕(尊王)이었습니다. 재야선비 처사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선비 사이에 임금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두고 갈림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임금의 잘못을 고치는 격군(格君)에 방점을 찍었다면, 혹자는 임금이 스스로 마음을 돌리고 뜻을 바르게 하고 성총(聖聰)을 되살려 줄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흔히 회천(回天)이라고 하는데 율곡 이이가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선조 초기 후배사림인 동인은 격군파가 많았고 전배사림인 서인은 후자의 편에 섰습니다.

너무 옆길로 왔습니다만, 무등산 자락이 붕당 때문에 크게 울렁거리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붕당의 시대, 무인의 길을 걷게 되는 우리 주인공은 어떠한 입장이었을까요? 생각나지요? 충무공 이순신이 덕수 이씨 같은 문중이었음에도 병조판서에 오른 율곡 이이를 찾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지요. 그러나 무인이라도 친소관계조차 없을 수는 없었겠지요. 이순신은 동인과 가까웠습니다.

충민사의 주인공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붕당, 당론과 관련해서 어떠한 증거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1589년의 ‘정여립 모반 고변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는 어떠하였으며, 광해군 치세 폐모살제와 붕당 대립, 1623년의 인조반정과 이듬해 ‘이괄의 난’에서 주인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3년, 평안도 구성부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으로 순국하고 충민사 윗자락에 묻혔습니다. 향년 53세, 본관은 천안. 1603년에 무과로 출신하였는데 그때의 인명록인 무과방목에는 본관은 부안으로 나옵니다. 순국 60년, 일 주갑에 즈음하여 장군이 생장한 광주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내린 정려는 외곽도로 뚫리며 경내로 옮겨왔다는군요. 충민사는 천천히 돌아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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