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 민족이에요(2) 고려인들은 왜 광산구 월곡동을 선택했나
우리도 한 민족이에요(2) 고려인들은 왜 광산구 월곡동을 선택했나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5.09.03 0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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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역사가 만들어낸 우리민족 핏줄인 고려인

2년 전 취재를 했던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센터를 찾았다. 벽면이 녹색 바탕에 빨간 글씨로 ‘고려인센터’라고 쓰여 있던 이 건물은 이제 정리를 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로 새단장을 했다.

이미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내부에 위치한 고려인마을지역아동센터에서는 미취학 고려인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광산구 월곡동은 2~3층의 주택이 즐비해있다. 언뜻 동네 분위기는 아직도 90년대~2000년 초반인 것처럼 느껴지고, 대형 상가나 고급 주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강제 이주 이후 구 소련 붕괴, 또 다시 흩어져

이 동네의 주민은 대부분 고려인이다.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아왔던 고려인들이 광주를 찾게 되면서 고려인마을이 형성됐다.

고려인은 구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뜻한다. 중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인 조선족과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로 이주했지만 1937년 스탈린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하지만 구 소련 붕괴와 신생독립국가의 탄생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고려인들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국가에서는 반기지도 않았고, 또다시 국적문제 등으로 새로운 난관에 몰리게 됐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인들은 러시아어, 우즈베키스탄어를 쓰고,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은 우리 한 민족의 핏줄이라는 것이다.

광산구 월곡동에 형성된 고려인 마을

그렇게 고려인들은 하나둘씩 모국의 땅을 밟기 시작했고, 광주에도 고려인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고려인 신조야씨와 새날학교 이천영 교장이 함께 지난 2009년 광산구 월곡동에 고려인센터 문을 열게 된다.

고려인들은 대부분 보통 H2(방문취업)비자를 갖고 기간이 만료되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불안감과 임금체불에 걱정이 앞서 찾아오는 고려인들이 많다. 임금 체불 뿐만 아니라 퇴직금을 못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업주가 업체명을 계속 바꿔버린 탓에 근속 기간이 2년으로 인정되지 않아 H2비자를 (방문취업비자) F4비자(재외동포 비자)로 바꾸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데도 왜 고려인들은 광주에서 정착하고 싶은 걸까. 우리말을 대부분 할 수 없는 고려인들이 광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인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신조야씨는 개소식 준비 이외에 하루에도 수십 통화씩 걸려오는 고려인들의 상담과 방문으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신조야씨는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기다리게 한 미안한 마음에 우즈베키스탄 전통음식인 쌈싸Самса(고기가 들은 빵)와 러시아 전통 빵을 가득 내어줬다. 겉은 빵인데 속은 만두 맛인 화덕만두 같은 맛이었다.

제도적 지원 정책 없어 어려움 겪어

그녀는 컴퓨터에 앉은 이천영 목사의 아들인 믿음씨에게 우즈베키스탄어로 알려주고, 영어철자로도 알려주고, 통·번역을 하면서 서둘러 서류를 준비하는 듯 했다.

이 서류는 입학허가서를 번역해서 작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이 우즈베키스탄이나 중앙아시아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입학허가서를 보내야 한다. 아이가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줘야 한국으로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은 관할 구청에서 팩스로 온 임산부에게 엽산제·철분제를 무료로 지원한다는 안내문을 러시아어로 바꾸고 있었다. 우리말로 된 안내문을 읽은 순간 한자어가 민망할 정도로 많아 기자도 똑바로 한 글자씩 읽어주며,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비교하는 일을 도왔다.

문서 번역 작업이 끝나서야 신조야씨는 한 숨을 돌리며, 2년 전 센터와 현재 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신조야 센터장은 “그동안 월세를 내고 2년동안 센터를 운영했는데, 이번에 센터를 마련하기 돼서 꿈을 이룬 것 같고 너무 좋다”며 “예전에는 일요일마다 고려인들에게 밥을 해먹였는데 지금은 3,400명으로 불어나 일이 너무 많이 늘어나 밥을 못 대접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기자가 2년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고려인 마을에는 8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는 3,400여명이 월곡동에 거주하고 있다.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신조야 센터장
▲새날학교 이천영 교장
고려인, 비자문제 해결 할 대책마련 시급해

고려인들이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도움을 손발 걷고 나서서 돕고 있는 신조야씨와 이천영 목사가 있기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고려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조야 씨는 “광주에는 고려인들에게도 학력을 인정해주는 새날학교도 있고, 고려인 센터도 있고, 일하고 있을 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고려인 어린이 집도 있기 때문인 듯 싶다”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은 비자문제인데, 하루 빨리 해결 되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그녀는 고려인들이 모국에서 살기 위해 애쓰는 과정 중에 자꾸만 힘들고, 안타까운 소식만 들려오는 애석하기만 하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고려인들이 재외동포 비자인 F4비자만 받게 제도가 완화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다.

고려인센터를 함께 이끌어온 새날학교 이천영 교장도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다니는 새날학교의 절반 이상이 고려인 자녀가 되었다”며 “이곳에서 고려인을 돕기위해 애쓰고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월급을 주는 게 소원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광산구 월곡동에 모여 형성된 고려인 마을은 아무런 지원 없이 민간조직의 힘으로 여기까지 이끌어 왔지만, 고려인들을 위한 법률적, 행정적 제도의 지원정책이 없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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