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대 광장문화 2. 광장은 시민이 소통하는 열린 장소
소통의 시대 광장문화 2. 광장은 시민이 소통하는 열린 장소
  • 서울=정인서, 김다이 기자
  • 승인 2015.09.0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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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 때마다 시민들의 집회장소 열기
도시의 새로운 장소, 의미 있는 공간 되살아나

서울에 가면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환호하고 기뻐하거나 울부짖으며 탄식한다. 때로는 집회를 통해 정부에 항거하고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는 시민들이 모여 응원하는 열린 장소이기도 했다.

아직 광주의 경우 이렇다할만한 광장이 없는 형편이지만 서울에는 서울시청앞 광장, 광화문광장, 청계광장 등이 걸어서 다닐 정도의 거리로 가까운 곳에 있다. 행사가 많을 때면 이곳을 걸어 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아관파천으로 몸을 피하였고, 나중에는 외국 열강들의 공관이 가까운 덕수궁에 머물렀다. 고종이 덕수궁에 머물자 주변의 시가지가 정비되었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까지 큰 도로가 개설되었다.

경성부청 앞에는 큰 광장이 조성되었다. 대한문 앞의 이 광장은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한국의 현대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경성부청은 1925년 9월 9일 정초식을 가졌는데 구 서울시청(경성부청) 청사는 등록문화재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취재진이 찾아간 날은 서울시청앞 광장은 행사가 없었으나 시청 앞 정문 입구에서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기독교단체의 항의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를 뜻하는 빨간 십자가를 매달아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 했다.

미래문화유산이 된 서울광장

서울의 광장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시 도심재생본부 역사도심재생과의 정재현 주무관을 만났다. 그는 광화문광장의 시설물 유지관리를 담당했다.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은 담당부서가 다르다고 했다.

서울시청앞 광장은 서울광장이라 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등이 일어났던 곳이며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전두한 정권의 신군부가 물러나게 되는 1987년의 6월 항쟁 등 시민의식과 이념이 집단적으로 표출되던 시대사적 흐름을 담았던 장소이다.

그런가하면 전 국토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시민 모두가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응원하는 열정을 쏟아 부었던 그 중심지역으로 시민과 도시 공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양태를 각인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본래 차도였다. 6월 항쟁을 비롯하여 각종 집회와 시위, 월드컵 응원과 같은 각종 행사, 전국 특산물 홍보행사 등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는 곳이다. 월드컵 이후 광장 조성 계획이 세워져 차도를 없애고 잔디광장을 만들었으며, 2004년 5월 1일에 완공하였다. 규모는 1만3,207㎡이다.

잔디광장이 넓고 시원해보였다. 주변에는 수많은 차들이 오고가는 속에 널따란 잔디광장이 도심의 허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디 면적은 6,449㎡로 추위에 강하고 연중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는 캔터키 블루그래스의 천연 잔디 종이다. 그래도 많은 행사가 열린 탓인지 흙이 보일 정도로 잔디가 사라져 외곽지역부터 잔디심기를 하고 있었다.

시청에서 광장을 지나 반대편에는 곳에는 평평한 바닥에 분수가 있었다. 수조가 지하에 묻혀 있는 분수로서, 가동되지 않을 때는 보도로 활용된다. 121개의 노즐을 통해 35가지의 분수가 연출되는데, 저녁에는 7가지의 수중 조명이 비쳐진다. 분수 높이는 높지 않은 편이다.

한편 서울시는 지난 2014년 12월 31일 서울광장을 서울시민의 기억과 감성이 담긴 가치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보고 서울시 미래문화유산보존위원회가 선정한 서울 미래문화유산으로 인증한 바 있다.

세종로, 차량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서울에서의 색다른 광장은 광화문광장이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광장이라 할 수 있다.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향하면 동아일보를 지나 교보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면 4.16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천막 안에 자리한 그들의 영정사진이 눈물을 울컥 나게 만든다. 이어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란리본을 만들고 있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현수막 등도 보였다.

광화문 광장은 세종로이다. 600년 역사를 나타내는 서울의 중심거리이다. 세종문화회관, 정부종합청사, 미국대사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광화문광장 양 옆으로 있고 몇 대의 경찰차량이 미국대사관을 방어하는 벽을 쌓고 있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광복7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전시가 열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립여성사전시관이 특별기획전으로 마련한 ‘독립을 향한 여성영웅들의 행진’이라는 전시가 눈에 띠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료가 현수막에 인쇄된 것들이고 실물자료는 부족해 아쉬웠다.

광화문광장 끝자락에는 경복궁이 있고 국왕이 드나드는 광화문이 눈에 다가왔다. 중국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면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뒤 너머에는 북악산과 청와대가 자리한다.

세종로는 10여년 전만 해도 차량과 매연으로 뒤덮였던 곳이다. 그런데 세종로 중심도로의 한 공간이 광장으로 바뀌었다. 상상 이상의 공간이 되었다. 세종로를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한 것이다.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드러나 보였다.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六曹)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사업은 2008년 5월 27일 착공되어 2009년 7월 말에 완공되었다. 길이 555m, 너비 34m이다.

예전부터 자리했던 이순신 장군 동상 외에도 세종문화회관 앞에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고 지하에는 세종이야기 등 상설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세종문화회관과 이순신장군 동상 사이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광장 중앙에는 미술, 조형미술 등 다양한 전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화문광장은 사진촬영장소는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2009년 당시 인기드라마 ‘아이리스’가 하루 종일 대규모 총격신과 폭파신을 찍느라 세종로 네거리 모두 교통통제가 이루어졌다. 2012년에는 유재석의 ‘런닝맨’ 촬영도 이루어졌다. 최근 개봉했던 ‘어벤져스2’도 촬영했다는데 별로였다는 후문이다.

하천 중심 새롭게 열린 청계광장

청계광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른 광장에 비해 바로 청계천을 따라 편도 1차선뿐이어서 한 길 건너 빌딩들과 쉽게 오갈 수 있었다.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카페거리 및 차 없는 거리 조성 등 다양한 광장 주변부 프로그램으로 인해 광장과 주변부는 하나의 광장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세운상가, 광장시장, 방산시장 등이 있어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다는 곳이다. 메르스 사태 대 크게 줄었던 관광객이 다시 늘면서 여기저기 깃발이 보였다. 그리고 소라 모양의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청계천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이들이 많았다. 됫편의 조그만 공간에는 천막이 쳐진 채 시민단체의 판매행사가 열렸다.

청계천은 서울의 도심 한 가운데 있어서 시민들에게는 휴식공간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개천이라 했는데 1916년경부터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하천 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했다. 1926년 복개한 이후 1만평의 택지조성 계획을 세웠다. 1935년에 도로와 그 위로 고가철도 계획을 발표하고 1939년에는 자동차 전용도로, 1940년에는 위로는 전차가 다니고 아래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재정문제로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실제 복개가 이루어진 구간은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전쟁을 겪으면서 청계천은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가난하고 불결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가였다. 대안은 복개(覆蓋)뿐이었다. 1955년부터 광통교 상류 135m 등 일부 구간씩 복개를 시작해 1977년까지 복개가 이루어졌고 그 위로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청계천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였다.

수십여년이 지나면서 청계천 복개와 고가도로는 개발시대의 무지가 낳은 흉물로 인식되었다. 2003년에 이르러 40여년간 덮여있던 청계천이 다시 열리는 복개(復開)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청계천로 태평로 시점부터 동대문을 거쳐 신답철교에 이르는 길과 삼일로와 그 주변 5.84km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13년까지 연차적으로 공사가 시작됐다. 모전교부터 시작해 광통교, 광교, 장통교, 삼일교, 수표교를 거쳐 두물다리, 고산자교까지 22개 다리가 복원되었다.

10개의 이벤트벽화도 있는데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영조어필, 청계천 옛 모습 벽화 등이 보였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광장의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는 공간이 되었다. 하천 중심의 수변광장으로서 그 성공을 지켜볼 때 광주의 경우도 광주천 복개구간인 양동복개상가 지역을 재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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