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걸어요(15) 독립로, 광주정신 깃든 학생독립운동 발상지
함께 걸어요(15) 독립로, 광주정신 깃든 학생독립운동 발상지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5.09.01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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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km, 백운광장에서부터 무등장례식장 앞까지

광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역사로 학생독립운동이 있다. 뜨거웠던 여름에서 선선한 가을로 접어드는 8월 마지막 날, 독립로(獨立路)를 지나가 보았다.

약 4km정도 되는 독립로는 도로 중간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있어 이름을 붙였다. 광주의 독립로는 출·퇴근길에 교통체증이 심각한 프라도 호텔방향의 백운고가 아래서부터 시작된다.

남구의 관문이기도 한 백운고가는 지난 1989년에 준공된 왕복 4차선 고가다. 하지만 백운고가는 급경사, 급커브로 시공돼 교통사고와 교통체증의 주범으로 지적받아 왔다.

백운교차로에서 시작되는 독립로

백운고가는 급커브길이 있어 운전 초보에게는 아슬아슬하고, 떨리는 구간이기도 하다. 백운고가의 커브길에서 시내버스와 승용차간 충돌사고를 목격한 적도 있다.

드디어 백운고가는 철거하기로 결정되었다. 백운고가가 철거된 백운교차로의 모습은 어떠할까 기대반, 우려반의 감정이 앞선다.

독립로는 진다리붓으로 유명한 백운동을 마주하고 있다. 독립로 오른편에는 진다리로라는 도로명이 이어진다. 40~50년 전만해도 백운동 일대는 붓 만드는 동네로 한가락 했던 지역이었다. 다양하고 종류별로 수많은 붓을 만든 백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붓을 구입하러 올 정도였다.

백운동은 그때당시 ‘벽도교(진다리)’라는 긴 다리가 있었던 곳이다. 전라도 사투리인 ‘질다’에서 유래해 60년대 말부터 이 동네에서 만든 붓은 ‘진다리붓’으로 부르게 됐다.

독립로를 쭉 따라 걸으면 2001년에 문을 연 프라도관광호텔이 있다. 광주에는 호텔이 몇 없기 때문에 광주 시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거리다.

그렇게 독립로는 백운동을 따라 백운휴먼시아를 거쳐 대성초교 사거리까지 이어간다. 독립로는 주요 교차로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대성초교 사거리를 지난 이후에는 구성로를 관통하는 월산사거리가 나온다. 월산사거리에서 더 가면 천변로 교차로가 나오고, 광주천을 건너는 천교가 나온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아낙네들이 나와 빨래터로 이용됐다고 한다. 천교를 건너면 독립로라고 명칭이 지어진 광주학생독립기념탑이 세워진 광주제일고등학교가 나온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기념탑 자리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잠시 들려 둘러보기로 했다. 공간이 협소했던 이곳은 현재 화정동으로 이전한 탓에 독립로에 위치한 이곳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아직까지 기념관은 자리하고 있지만 1층에 전시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인기척을 듣고 둘러보겠냐라는 눈 사인을 주더니 불을 켰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항일투쟁 사건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통학열차에서 일본인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괴롭혔던 사건으로 불씨가 됐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댕기머리 사건’이다. 당시 여학생들은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와 잘 손질해서 입은 치마저고리 교복 차림새로 통학열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등교하는 열차 칸 안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도 하고 바뀌어가는 자연 풍경에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던 것. 다만 일본인만 타지 않는다면 더없는 낙원이 될 열차였을 터다. 이 통학열차에는 광주여고보(光州女高普, 현 전남여고) 3학년에 다니던 박기옥과 이광춘, 암성금자가 날마다 함께 나주에서 통학을 했다.

일본학생들은 댕기머리를 하고 다녔던 여학생들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을 했다. 당시 처녀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는 것은 부모도 안한다고 할 만큼 금기(禁忌)로 여겼던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1929년 11월 3일 참을 수 없는 분노는 결국 터졌고, 광주고등보통학교(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다니는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인들의 괴롭힘에 대항해 학생들 사이에서 무력투쟁이 벌어졌다.

학생들의 항일시위가 벌어지고 난 이후 항일운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서울로 통하는 길목, 광주읍성 북문 밖 공북루터

독립로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6호인 광주학생독립발상지가 지나는 길이다.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념탑이다. 기념탑의 하단부에는 학생들의 시위모습을 조각으로 새겼고, 그 위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또한 광주제일고등학교 앞에는 공북루가 있었다. 공북루터를 알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에는 ‘이곳은 조선시대 광주읍성 북문 밖에 있던 공북루 터다. 1916년 경에 헐렸는데, 이 건물에서 누문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옆에는 조그마하게 공북루 모형이 세워져있다. 다시 말해 이곳은 광주의 북문 밖,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사라지게 됐다.

광주학생운동발상지를 뒤로 독립로를 쭉 따라가 보았다. 독립로는 금남로 5가와 지하철 1호선을 관통하고 나면 롯데백화점광주점이 나온다. 또한 인근에는 광주은행 본점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자리하고 있어 광주를 오면 꼭 거치는 장소 중에 하나 곳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북적였을까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이곳은 80년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군의 격전지로 현재는 사적지 표시가 되어있다.

폐선부지였던 푸른길 공원 시작점 위치

이처럼 독립로는 광주에서 꽤나 의미 있고, 상징적인 장소를 관통하는 도로다. 롯데백화점에서 대인교차로를 지나면 전국 유일한 명칭인 건축자재의거리가 나온다. 중흥1동과 계림1동 사이를 관통하는 독립로 일대에는 건축자재 점포들이 줄줄이 모여 있다.

이곳은 1970년대 목재 가게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지난 2003년 특화거리로 지정된 거리다. 건축자재의 거리에는 집을 지을 때 사용되는 대문부터, 거실 바닥재, 조명, 인테리어 자재, 목재, 타일, 환풍기, 파이프까지 없는 것 없이 모두 다 있다.

그렇게 건축자재의 거리를 지나는 독립로에는 폐선부지를 활용해 시민들의 쉼터로 재탄생한 푸른길공원 입구도 있다.

광주~여수구간 경전선이 지나다녔던 도심 속을 관통하는 이 철길은 사고위험이 많아 폐선요구가 많았고, 오랜 진통 끝에 결국 폐선됐다.

광주 시민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광주역~효천역까지 철도의 폐선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오랜 세월동안 인근주민들에게 생활불편과 도시경관 저해 등 수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결국 10.8km의 이곳은 2000년 8월 폐선되고, 같은해 12월 ‘푸른길’ 조성으로 최종 결정됐다. 지금은 동구, 남구, 주민들이 여가시간에 애용하는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다.

그렇게 독립로는 푸른길공원 입구를 지나 안보회관 앞 교차로를 거쳐 무등장례식장 앞에서 끝이 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저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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