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6)
무등을 돌다(6)
  • 이종범 조선대 교수
  • 승인 2015.08.0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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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7월 10일 호남회맹군이 금산에서 무너지고 약 스무날, 호남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재기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임계영(任啓英)을 앞세운 보성ㆍ장흥ㆍ순천 등의 호남좌의병과 최경회(崔慶會)가 맹주로 나선 광주ㆍ화순ㆍ담양ㆍ장성 등의 호남우의병이었지요. 금산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고종후(高從厚)도 서둘러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복수의병을 조직에 나섰습니다.

남도에서 의병이 재기할 때 조헌(趙憲)ㆍ박춘무(朴春茂) 그리고 영규(靈圭) 스님이 이끌던 호서의병은 8월 초하루에 청주를 수복하고, 한가위부터 사흘간 금산에 웅크린 일본군과 혈전을 치르면서 칠백의사가 산화하였습니다. 조헌의 결단으로 진행되었던 2차 금산전투는 거사가 늦어 호남회맹군과 연합하지 못하였던 통한의 씻김굿과 같았습니다.

호남의병이 감당한 1차 금산전투와 호서의병이 분발한 2차 금산전투는 분명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전라도를 넘보던 일본군을 삼남 요충인 금산에 묶어두면서, 전라도와 충청도가 연통하고 결속하는 기틀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호남의 관군은 권율을 따라 재차 북상하며 한양수복전에 나설 수 있었고, 경상우도의 관군과 의병도 개전 초기 불화를 씻고 전열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이때 호남의 재기의병은 경상우병사 김성일의 관군 및 곽재우ㆍ김면ㆍ정인홍 등의 의병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면서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10월에는 진주성까지 지켜냈습니다.

이렇듯 임진년 4월 전쟁 이래 혼비백산하던 지상군이 회생하는 과정에서 호남과 호서의 의병이 흘린 금산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경명과 조헌 두 맹주에게 ‘영원한 의병장’ ‘절의의 화신’이라고 칭호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만, 지금쯤은 금산전투의 앞뒤에서 호남과 호서의 의병연합을 추진하고, 호남과 호서의 재궐기를 격렬하게 촉구하였던 송제민 또한 오롯이 기억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송제민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특히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덕령이 의병장으로 나설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명과 일본이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김덕령을 잃었습니다. 충청도 부여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이 허장성세로 이름 석 자를 되뇐 것뿐인데, 역적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목숨을 앗긴 것입니다!

김덕령은 외가 쪽 재종제였으며 사위 권필과는 둘도 없는 벗이었습니다. 그동안 동서로서 종유하였던 고경명과 두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 자신이 맹주로 추대한 김천일, 사위의 숙부이자 동지인 양산숙 등이 금산전투와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사실도 견딜 수 없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차마 통곡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송제민은 세상을 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방비책을 건의하러갔다가 옥사에 갇혔습니다. 머리가 벗겨진 터라 일본인 첩자로 오해받았던 것입니다. 이후 호남이 처절하게 유린되는 상황에서 송제민 일가는 처절한 이산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장남 타(柁)는 무안으로 피난하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는데, 한산도 앞바다에서 허술한 일본군과 대결하다가 스스로 바다에 투신하였으며, 둘째 아들 장(檣)은 가족을 돌보다가 포로로 끌려갔고, 그때 7살 넷째 아들은 피살되었습니다. 한때 바다에 뜻을 두고 진취하리라는 꿈을 꾸며 해광을 자처하였건만 이제 바다만 보면 아프고 쓰라려서 미칠 것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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