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먹거리 이야기 1
강진의 먹거리 이야기 1
  • 한울 시민기자
  • 승인 2015.07.3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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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만의 낙조
무더위가 기승이다. 남도의 문화답사 1번지, 이번 주말부터 청자축제가 열린 강진의 먹거리를 이야기 하고 싶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강진에 대해 ‘강진은 탐라에서 바닷길로 나오는 길목이 되어 말·소·피혁·진주·자개·귤·유자·말갈기·대나무 등을 판매하는 이익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이미 이중환은 병영(兵營)상인들의 이재(理財)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진은 중앙부까지 양 갈래의 대륙이 갈라지면서, 깊숙이 탐진강을 비롯하여 장계천·강진천·도암천 등 여러 하천들이 흘러들어 강진만의 풍부한 개펄을 만들어 ‘인(人)’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하천의 하구에는 영양이 풍부한 개펄로 형성되어 있어, 대합·꼬막·굴·갯장어·새우·낙지·숭어 개펄에서 서식하는 연안 수산물이 많이 잡혔으며, 강진만의 갯물 길을 따라 먹이가 풍부하여 근해어종의 도미와 농어·우럭·광어·가자미 등이 올라와 오래전부터 먹거리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현 강진군청 일대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우리선조들은 풍수지리에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변의 땅을 모든 사물과 비교하는 안목을 지니며 이야기 하였다. 강진은 풍수지리상 황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국 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별나게 소우(牛)자가 들어가는 지명과 소와 연관되는 설화, 전설이 많다.

▲강진만의 풍부한 갯벌
옛 강진관아의 아전들이 안하무인이어서 중앙에서 내려오는 현감들과 마찰이 많은 지역으로 요즘 시쳇말로 “골 때리는 고을”로 소문나 있었나보다. 그러다보니 현감이 공석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효종(1653년)때 신유가 강진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누군가 그에게 귀띔하여 와우형을 알게 되어 고심했다. 황소의 드센 기운을 잠재우기 위한 방안으로 소의 코에 코뚜레를 뚫어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코에 해당부분에 땅을 파서 그곳에 코뚜레인 연꽃을 심어 황소의 기운을 눌렀다고 한다. 그 후 강진의 아전들은 점점 드센 기가 사라 졌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진읍 남문(南門)마을 지명은 연지(蓮池)이었는데, 읍의 사대문인 남문이 있는 마을이라 남문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또한 군내면 연지리(蓮池里)는 1789년 ‘호구총수’의 기록에 마을 지명이 연지변리(蓮池邊里)로 되어 있어 아마도 주변에 연꽃 방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진읍 목화(木花)마을의 뒷산이 소의 형상으로, 이 마을은 소를 먹이는 목동(牧童)이라는 뜻으로 목아동(牧兒洞)이라 했다.

그러다 목화동으로 불리게 되었고, 강진읍 홍암(紅岩)마을은 뒷산이 우두봉(牛頭峰)을 중심으로 흘러 내려와 소 혀끝에 머무는 형국이라 하여, 일명 싯끝(혀끝)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진 읍내에서 마량 방면으로 나가면 남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우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목포-부산 길 국도 2호선이 강진 읍내에 들어오면 거의 90도로 휘어지는 곳이 강진읍 남포(南浦)마을로 부르며, 또 다른 지명은 성자포(星子浦) 또는 남당(南唐)이라고 한다. 이곳은 남쪽으로 배가 다니는 길목으로 제주를 다니는 항로로, 선비들이 정적인 운치를 살려 남방(南方)의 당호(塘湖), 즉 ‘은은한 호수’라 불렀다고 한다.

야사(野史)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좀 귀찮게 굴던 나주목사를 불러 남당에서 장흥천관에서 뜨는 달을 보면서 뱃놀이 연회를 베풀었더니, 이놈의 목사가 남당의 비치는 달빛에 빠져 매달 보름만 되면 내려오는 통에 다산의 제자들이 곤혹을 치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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