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5)
무등을 돌다(5)
  • 이종범 조선대 교수
  • 승인 2015.07.0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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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범 조선대 교수

해도원수 정지 장군과 금남군 정충신 장군을 모신 경렬사를 나와 무등산을 따르다보면 청풍야영장 지나고 청풍쉼터까지는 아스팔트 포장만 하면 사람을 내팽개치는 시골길 풍경에서 흔치 않는 인도가 갖춰서 있어 걸을 만합니다.

언젠가 전용호, 김선출, 김영집 등이 장애우와 함께 ‘빛과 생명의 광주 걷기’에 나섰을 때, “인도를 갖추지 않는 나라, 인도주의 없는 나라”를 외친 적이 있었답니다.

김삿갓 시비가 있는 청풍 쉼터에서 바라보는 청옥동 제4수원지는 포실합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과 대학생들의 북한사회 바로알기운동이 맹렬히 술렁이던 1989년 5월, 수배 중이던 조선대학교 민주조선 편집장 이철규 군이 변사체로 떠오른 현장임을 새기면 먹먹합니다. 그런 시대를 겪고서도 민주화에 안도하다가 그때보다 더한 짓이김을 당하는가 합니다.

제4 수원지 지나면 화암동, 그 너머 금곡동에는 충절의 세 분을 모신 서원 사우가 있습니다. 바로 임진의병에 종사한 송제민(宋齊民)의 운암서원, 정묘호란 당시 순국한 전상의(全尙毅)의 충민사, 그리고 의병통제사과 같았던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을 모신 충장사가 있습니다. 먼저 운암서원부터 찾아봅시다.

운암서원의 주벽인 송제민은 1549년 담양 대곡에서 송정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1556년 문과에 들고 벼슬을 마다하고 고봉 기대승과 강학하다가 26세로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한동안 처가 근처 황계 오늘날 운암동에서 모친을 모시고 살며 생활은 어려웠어도, 한동안 무안과 나주를 무대로 학단을 일으킨 곤재 정개청에게 배우고, 선조 치세 사림재상으로 이름 높은 사암 박순에게도 의지하였습니다.

사암은 처당숙이었습니다. 제봉 고경명과 송강 정철을 종유하며 토정 이지함의 문하에도 들었습니다. 당대 최고 학자를 스승 삼으면서도 과거에 응시하려면 필요한 향교 출석에는 소홀한 듯싶습니다.

송제민에게 토정의 영향은 막강하였습니다. 토정은 경세제민의 웅대한 뜻을 품었던 독특한 학자였습니다. 늘그막에 천거로 사또를 하면서 이룩한 빈민구제의 명성은 지금도 유명합니다. 가마니 짜기나 소금 굽기로 민생을 북돋았다는군요. 국부와 민업을 살리기 위하여 해양에 눈을 돌린 점도 인상 깊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 먼 바다를 오갔습니다.

송제민 또한 무안에 옮겨 살면서 자주 바다를 나갔고, 간척사업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곤재나 오촌고숙이던 미암 유희춘에게 질책도 받았지만, 그래도 바다가 좋아 바다에 미쳤다며 해광(海狂)으로 자호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광은 황룡강 박산 마을의 양산룡ㆍ산숙 형제 등과 나주 김천일을 맹주로 추대하고 김천일의 종사관을 자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원 독산산성에서 막히자, 강화도로 들어가는 맹주를 따르지 않고 조헌ㆍ박춘무를 만나 호서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며, 북상하던 제봉 고경명의 호남의병과 연합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초순 금산의 일본군단을 공격하던 호남의병의 주력이 무너지자, 뭇 사람의 심금을 때린 격문을 날리며 남하하였는데 요지는 단순명료하였습니다. “명군이 남하하고 있다! 이때 호서의병이 호서를 지키고, 영남의병 또한 영남을 지키면, 한강 이북과 중원의 왜적이 일시에 호남으로 밀려들 것인데, 호남은 어떻게 되겠는가!” 호남에 닥칠 위기를 명쾌하고 긴박하게 알리며 호남의병의 재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호남에서 가장 먼저 북상하고 또한 호남과 호서의병의 연대에 종사하였던 만큼 호소력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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