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동의 붓 명필장 소천 채태원에게 듣는다.
백운동의 붓 명필장 소천 채태원에게 듣는다.
  • 신문식 시민기자
  • 승인 2015.07.0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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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를 보존 전승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변해야

▲ 가정에서 붓을 보관하는 붓걸이를 보이고 있다.
광주시 서구 주월동 해태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백운동 붓의 필장인 소천 채태원을 찾은 것은 지난 6월 30일, 살아있는 백운동 진다리 붓의 명장들을 찾기 위해서다.

백운동은 진다리 붓은 백운2동의 상표로 만들었으며, 진다리 붓은 백운2동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일환의 핵심이며. 흰 구름이 흐르는 난지실 마을 이야기의 핵으로 영상제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운동에는 진다리 붓의 상표를 가지고 있는 안명환 장인이 있고 죽필로 유명한 문상호 장인이 백운2동에 살고 있으며, 소천 채태환 장인은 백운동에서 살다가 주월동으로 이사를 했다.

소천 채태원 장인은 백운동에서 붓 만들기는 본인의 스승인 김복동의 선친께서 처음으로 붓을 만들었고 그 후로 김복동. 박순. 김장원. 이정방. 안종선 장인들이 붓을 제작하였으며 그 이후로 본인이 처음으로 붓을 만들었다고 했다.

살고 계신 곳이 아파트인지라 좁은 공방에서 붓을 만들고 있었다. 좁고 어두컴컴한 전등아래서 붓에 집중하고 있는 장인의 모습에서 장인다운 연륜이 스며있었다. 가는 털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듬고 정리해서 붓의 4덕을 갖추게 해야 비로소 붓이 된다.

▲ 완성 된 여러종류의 붓들이 공방에 걸려있다.
백운2동의 영상제작위원들은 백운동의 낙후된 지역 생활환경이 문화예술인과 민족전통문화 전승자들에게 보탬이 되지못한 현실과 박물관이나 전시관이 없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 진다리 붓을 백운동의 상표로 만들자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장인들을 찾아 백운동의 붓 역사와 문화를 찾아 기록하고 그 당시의 백운동의 역사와 문화를 후세에 남겨주기 위해서 최초의 살아있는 장인 소천 최태원 장인을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소천 최태원 장인은 “진다리는 벽도교를 말하는 것이고 벽도교가 긴(진)다리였다. 백운동 검문소 앞에 있던 다리로 큰 냇가는 아니지만 시멘트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가 벽도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어린 시절 백운동은 땅이 질퍽거려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진 들(질퍽거리는 들)이었다. 그래서 ‘긴 다리’와 ‘진 들이’가 오랜 세월 속에서 구전되어 ‘진다리’가 된 것이지 어디에서 가져온 이름은 아니다.”고 말했다.

백운동 김종철 영상제작위원은 “우리가 우리 상표를 지키지 못하고 이사하게 만든 것은 백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소외되고 낙후된 것이 한심스럽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다. 문화가 곧 지역의 경쟁력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리 예측했어야 한다. 우리지역의 문화예술가나 전승자들이 붓의 본고장인 ‘백운동 진다리’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방문 앞에 걸어두면 잡귀가 물러간다는 백마 털로 만든 큰 붓.
소천 채태원 장인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게 붓 만드는 기술을 배웠는데 1960년 말경 스승인 대하 김복동(광주시 무형문화제 제4호) 스승을 만나면서 우리나라 전통 붓 제작 기법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소천 채태원 장인은 대하 김복동 스승이 우리나라 진다리 붓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명필장인으로 각광을 받던 스승이었다고 침이 마르게 스승을 칭찬했다.

소천 채태원 장인은 대하 김복동 스승이 작고하는 바람에 수제자로 3년밖에 배우지 못해서 그 당시 백운동 진다리 붓 광주시 무형문화제 전수자로 선정되지 못해서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소천 채태원 장인은 백운동이 붓의 고장이 된 것은 해남 완도 진도 등 해안지방에서 생산하는 하얀 염소 털은 12월에서 3월 사이에 생산하는 털이 가장 좋다. 그 염소 털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백운동에서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붓의 고장이 되었다고 말했다.
소천 채태원 장인은 각고의 노력과 피나는 연마로 진다리 붓이 아닌 자신의 호를 상표로 『소천 필(小泉筆』로 자기만의 기술을 쌓으면서 한국 문화예술계의 호평을 받으며 명필장이 되었다고 추억을 회고했다.

▲ 빛자루처럼 큰 붓을 선보이고 있다.
소천 채태원은 붓의 전성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 협정 때에 외교문서에 서명하는데 붓으로 서명해야 지워지지 않는다는 일본인들 때문에 붓으로 서명하게 되었는데 그 후로 서예 전성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는 대통령이 서예를 좋아하니 장차관 공직자들이 너도 나도 서예를 하게됨으로 서예의 붐이 일어났으며 정신없이 붓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육영수 여사가 서예를 좋아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여성회관에 정기적으로 납품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로라 하는 공직자들은 물론 전두환시절도 서예의 붐은 조성되었으며 소천 채태원의 붓은 서예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정기적으로 납품하게 되었다고 붓의 호시절을 회고했다.

가장 바람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가 붓을 만들어 파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다. 전수자가 있어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요즘 시대에 수익이 없는데 전수자가 있겠는가?”

이어서 “체험관이나 진열하는 전시관. 박물관이 있어야 보고 체험해 보려는 수강생이 생길 것인데, 좁은 공방에 저렇게 쌓여있으면 뭣하겠나. 꼭, 붓의 고장 백운동에 붓 박물관. 체험관. 전시관. 공방 등이 만들어지는 것이 소망이지만 춘몽이 아니겠는가? 서예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교육정책이 바꿔져야 하고 학교에서부터 서예의 붐이 조성되고 사회적으로 서예경시대회가 개최되어야 한다. 시대가 변하는 것을 어지하랴만은 조상의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소천 채태원 장인은 1942년 전남 담양출신이다. 1973년 11월 20일 제1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에 입선을 시작으로 1974년 5월14일 중앙일보 가업(家業)란에 연재되기도 했다. 1980년 9월 29일 제5회 전승공예대전에 입선했다. 그 후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방송을 탔으며, 2000년 최근에 제30회 전국공예대전 전남도예선 특선을 수상했다. 2000년부터 소천 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 백운동 진다리는 벽도교가 진다리이며 백운동은 진들이로 장화가 당시에는 꼭 필요한 황토지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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