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9)
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9)
  • 이르쿠츠크=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6.04 0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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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베츠코이의 집, 생존 당시 사용하던 유물 그대로 전시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트루베츠코이의 집
끝없는 얼음의 땅. 시베리아에서 혁명만 아니었더라면 귀족으로 호화롭게 살았을 데카브리스트(Dekabrist). 제정 러시아 시대 농노제 폐지 등 개혁적인 혁명을 일으켰던 이들은 상트페테부르크에서 머나먼 길을 따라 이르쿠츠크(Irkutsk)에 유배를 왔다.

이제는 이르쿠츠크에 데카브리스트들의 자취만 남게 됐다. 이르쿠츠크 시내의 중심가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아담한 목조 가옥은 소박하면서도 유럽식 창문이 있어 내부는 어떨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번에 취재진이 찾은 곳은 트루베츠코이(Trubetskoy 1790~1860)의 집이다. 볼콘스키의 집에서 차로 5분 이내 거리에 위치해있다. 지난 728호에 소개된 연한 하늘색 바탕의 목조건물이었던 볼콘스키의 집과 외관은 똑같아보였으나 내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데카브리스트 내외 초상화 함께 걸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기념관에 걸려 있는 트루베츠코이 공작 내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보통 전남 지역에 유배인들이 머물렀던 초사나 적거지에는 텅텅 비어있거나 그나마 유배 당사자의 초상화만 걸려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자유를 외치며 혁명을 일으킨 데카브리스트가 머물렀던 내부에는 항상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이들을 따라와 헌신하며 함께 살아온 아내의 초상화도 함께 걸려있어 이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했을지 눈을 감고 상상하기 충분했다.

볼콘스키의 집보다는 아담한 편으로 지하층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유배 당시 실제로 유형수들의 발에 채웠던 족쇄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 족쇄를 바라보며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강제노역을 했기 때문에 삽과 곡괭이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내부에는 당시 귀족이 누렸던 유럽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유산들이 가득했다. 트루베츠코이가 입었던 옷, 그들이 사용했던 펜, 책상, 찻장, 피아노, 테이블 등 모든 유산들은 처다만 봐도 우아함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트루베츠코이의 집 전시팀장인 Pasko Kurchatov이 잠시 자리를 비운 터라 <시민의소리> 취재단은 인근에 위치한 즈나멘스키(Znamenskiy) 수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베리아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여자 수도원이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 예카테리아 잠들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지금도 미사를 보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고, 가장 처음 시베리아로 온 트루베츠코이의 아내 예카테리나(1800-1854)의 묘가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아이들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예카테리나의 묘가 있는 즈나멘 수도원은 조용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묘위에는 늘 꽃이 놓여있다고 한다.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는 데카브리스트 부인들 중에 가장 먼저 시베리아에 온 부인이다. 예카테리나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로 문화적 수준이 매우 높은 집안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유형을 가게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뒤따라갔다.

▲즈나멘스키 수도원 입구
예카테리나는 수십 키로나 되는 무거운 족쇄를 차고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트루베츠코이를 처음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남편의 족쇄에 입맞춤을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차츰 형벌이 완화되면서 이르쿠츠크로 이동해 살 수 있게 되었고, 내외가 함께 거주할 목조가옥이 지어지기 전에 부인은 암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트루베츠코이는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1856년 사면을 받았고, 그녀는 2년 전 1854년에 사망하여 결국 이를 지켜보지 못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에서 다시 트루베츠코이의 집으로 발길을 돌려 전시팀장 Pasko Kurchatov를 만났다.

Pasko Kurchatov는 “트루베츠코이는 13년동안 강제노역을 하고, 17년동안은 이 지역에 가두었다”며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는 1만 5천명의 노예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모든 걸 버리고 남편을 따라 이르쿠츠크에 왔고, 이곳에서 숨을 거둬 다시는 그쪽으로 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명감 갖고 이르쿠츠크 변화시키려 노력

그는 “데카브리스트들로 인해 19세기에는 이르쿠츠크의 모든 문화가 궁정문화로 번지기 시작했다”며 “당시 이르쿠츠크에는 노예는 없었지만 상인들이 주로 많아 부자들이 추구하는 것도 이러한 문화를 배우고자 했다”고 말했다.

특히나 이들이 사명감을 갖고 생각했던 것들은 돈과 명예는 바라지 않고, 자신들의 지녔던 지식과 문화를 이르쿠츠크에서 퍼트려 변화를 시키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트루베츠코이의 집 전시 팀장 Pasko Kurchatov

또한 교육과 도서관, 학교에 전념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유배인들이 남도의 유배지에 왔을 당시 지역민들은 그들의 문화와 교육을 배우고자 했고, 그들을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준 점은 유사하게 느껴졌다.

이르쿠츠크 시청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부서의 디렉터 Aksamentova Olga씨도 “트루베츠코이는 굉장히 전략적이였고, 사상적이었다”며 “정치적으로는 농노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고, 20~25년 근무하는 복역을 15년으로 낮추려고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트루베츠코이는 1825년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모으기 시작해 이르쿠츠크에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으로 지난 1970년 처음 개관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

비록 유배인의 신분이었지만 최고의 교육, 최고 유행했던 문화를 가져와 이르쿠츠크를 ‘시베리아의 파리’로 문화수준을 끌어올린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예우나 관련 유물을 발굴해 살았던 곳에 그대로 전시하는 형태는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남도 유배지에 꼭 필요한 부분인 듯 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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