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7)
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7)
  • 이르쿠츠크=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5.25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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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의 유배지
혹독한 강추위 속 6000km 따라 정착, 30년간 머물러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세계문화유산인 바이칼 호수 위쪽에 위치한 이르쿠츠크. 사진은 리스트 비앙카에서 바라본 바이칼 호수의 풍경
▲앙가라강과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가고 있는 이르쿠츠크
절망 속에 몇 천리 길을 따라 유배를 떠났던 유배인들은 수도와 멀리 떨어지고 섬이 많았던 전남지역에 유배를 많이 왔다. 그만큼 전남지역은 유배장소로 적격지였다.

시베리아의 유배지였던 러시아 이르쿠츠크는 전남 지역과 많은 구석이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르쿠츠크에서 유배인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유배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이르쿠츠크 시청
세계문화유산, 바이칼 호수 품은 아름다운 도시

<시민의소리> 취재단은 인천공항으로 이동해 러시아 이르쿠츠크(Irkutsk)로 향하는 비행기 편에 몸을 실었다. 취재단의 출국일은 이르쿠츠크로 가는 올해 첫 직항편이었다. 5월에 직항을 열게 된 이 직항편은 9월~10월 경에 다시 문이 닫힌다.

그만큼 빨리 겨울이 찾아오고, 꽁꽁 얼어가는 땅과 그칠지 모르고 쌓여만 가는 눈으로 인해 4월까지도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만약 직항편이 없었더라면 모스크바 등 타지를 경유해 수십 시간을 비행기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드넓은 땅과 다양한 시차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다.

그중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바이칼 호수(Baikal)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바이칼 호수 덕분에 이르쿠츠크는 영하 30~40도의 다른 시베리아 지역에 비해 비교적 살기 좋은 기후가 지속된다.

이르쿠츠크 시내는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하는 풍부한 앙가라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도 제정 러시아 시대 머나먼 길을 따라 유배를 온 데카브리스트(Dekabrist)가 있었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에 혁명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1825년 12월 14일 절대 군주에 항거하여 혁명을 시도했던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왜 데카브리스트들은 머나먼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이르쿠츠크까지 오게 됐을까?

1825년 12월 14일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즉위식을 맞아 무장한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열 속에 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전제정치 종식, 농노제 폐지 등 민주적인 제도 개혁 등을 외치며 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데카브리스트 광장
▲데카브리스트 유배 이동 경로
데카브리스트, 12월의 혁명 농노제 폐지 등 요구해

그러나 혁명에 참여했던 데카브리스트는 곧바로 체포가 되었고 진압이 됐다. 그 중 파벨 페스텔,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등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116명은 재산 몰수, 귀족 신분 박탈을 한 후 머나먼 시베리아로 추방당하게 됐다.

이들은 그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000km나 떨어진 이르쿠츠크까지 걸어서 유배길에 올랐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모든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 영하 30~40℃의 혹독한 추위 속에 머나먼 길을 따라 이곳으로 추방당했다.

데카브리스트는 이르쿠츠크에서 30년간 생활하면서 유배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중 가장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로 발콘스키와 트루베츠코이가 있다. 이들이 유배생활동안 머물렀던 곳은 이르쿠츠크 시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
다양한 사람을 만나본 결과 이르쿠츠크 현지에서는 데카브리스트보단 불같은 사랑을 했던 그들의 아내에 대한 존경심이 더 높았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아내들은 수천 키로미터의 눈길을 따라 걸었고, 트루베츠코이의 아내인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족쇄 찬 발에 입맞춤을 했다고 한다.

한 때는 명망가에 부유했던 아내들은 데카브리스트와 함께 척박했던 이르쿠츠크 지역에서 유럽 궁정문화를 퍼트렸다. 유배생활을 함께 해줬던 아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르쿠츠크가 발전하고, 유럽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발콘스키의 집과 트루베츠코이의 집 인근 작은 소공원에는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2011년에 세워졌다. 현재 기념비는 교육행정 업무를 보는 건물 앞에 세워져 있고, 공원에서 앉아서 쉬는 시민들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이르쿠츠크 시내에는 데카브리스트를 기념하기 위한 데카브리스트 광장도 있다. 이 인근은 데카브리스트 길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야외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근사한 곳이 많았다.

▲시민의소리 취재단은 Aksamentova Olga를 만나기 위해 이르쿠츠크의 문화행정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향했다.

죄형 클수록 수도에서 먼 곳으로 유배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부서 장 Aksamentova Olga
이르쿠츠크 시청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부서의 디렉터 Aksamentova Olga씨를 만나 이르쿠츠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가 유형지가 된 이유에 대해 Olga씨는 “특별히 유배지로 지명한건 아니고, 그 당시 시베리아 전체가 유형지였다”며 “제일 처음은 유럽에 가까운 시베리아와 우랄산맥 경계쪽이였고, 1590년대 제일 처음 정치범이 오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유배형에 대해서는 “18세기 중엽에 사형제도를 없애면서 유형을 만들었다”며 “강제노역, 지역 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등 죄형이 클수록 수도에서 멀리 유형을 보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도 죄인을 수도에서 가장 멀리로 유배를 보낸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도 전남지역과 비슷한 면모를 지닌듯 했다.

그녀는 “소련시대에도 유형이 있었고, 교회와 관련되거나 농민 봉기 하는 사람 등을 유배 보냈다”며 “1960년대 이후 공산주의 등 문제로 더 이상 유배는 안하게 되었다”고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줬다.

한편 러시아 내에서도 데카브리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이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고 한다. 한 가지 견해는 여전히 죄인으로 취급하는 분류, 또 하나의 견해는 이르쿠츠크에 풍성한 궁정 문화를 전파한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새롭게 급부상하고 있는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가 앞으로 슬픈 역사의 탈을 벗고 유배문화 자원이라는 또 다른 자원을 활용해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기사는 지역발전신문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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