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유산 콘텐츠화7. 금석문 분야
호남기록유산 콘텐츠화7. 금석문 분야
  •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 승인 2015.05.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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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금석에 새겨진 기록물 역사연구 가치 높아

오늘날 한국의 문화는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한류(韓流)의 확산으로 한국은 친숙한 나라가 되었고, 해외 박물관에서는 한국전(韓國展)을 기획 전시하고 있으며,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는 한국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프랑스의 파리7대학 한국학과에서는 한국의 금석문을 강의한다고 하니 한국학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을 알 수 있다.
금석문은 쇠나 돌에 새긴 글을 말하는데, 한국학 속의 금석문은 역사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남아있는 문헌사료가 거의 없을 경우 금석문이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일례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칠지도(七支刀)〉로 한일관계사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모든 기록유산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금석문은 어떤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영원히 전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금석문의 종류로는 기공비(紀功碑), 송덕비(頌德碑), 정려비(旌閭碑), 유허비(遺墟碑), 묘정비(廟庭碑), 신도비(神道碑) 등이 있다.
나라에서는 충신과 효자를 뽑아 정려비(旌閭碑)를 세워 절의(節義)를 장려하였고, 지역의 유력한 가문에서는 개인의 사적을 묘비나 신도비(神道碑)에 새겨 기억하려 하였으며, 지역공동체에서는 선정을 베푼 관리나 마을에 은혜를 끼친 이에 대해 송덕비(頌德碑)나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등을 세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역사적 현장에 남아있는 스토리

이러한 금석문이 다른 종류의 문헌과 구별되는 특징은 재료의 특성상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듯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마멸과 부식이 되기 마련이다.
또 다른 특징은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과 관련이 있는 곳이나, 어떤 사실이 발생한 현장에 세워진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도서관에서 서책류의 문헌으로 접하는 것과 역사적 현장임을 감안하고 금석문으로 접할 때 느끼는 감동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장장 7년을 끈, 나라가 거의 초토화되는 우리나라의 비극이었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의병장이나 열녀에 관한 금석문들이 전하는데, 선조(先祖)들의 목숨으로 일군 나라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생명이 없으면 부귀영화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맹자〉에서 이르기를, “살고자 하는 것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내가 진정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싫은 것이 있기 때문에 환난에 죽음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辟也〕”라고 하였다.
선조들에게는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었다. 바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의로움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도망간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데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명예를 위해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때 막하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산동 277-1번지 부근
기록이 없으면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기록이 있어도, 세상에 알려지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을 남겨야 잊히지 않을 수 있다. 평택임씨(平澤林氏) 집안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편과 자식을 잃은 내막을 비석에 새겨 전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林谷洞) 탑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가 그것이다. 예전 임곡면(林谷面) 등림 부락은 평택임씨의 세거지로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이곳에 후손들이 1915년에 이 유허비를 세워 선조의 유풍을 기리고 있으며, 비문은 한말의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었다.

충효의 정신을 돌에 새기다

그 비문을 살펴보면, 선무랑(宣務郞) 임영수(林英秀)가 중심인물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인 충정공(忠貞公) 임언수(林彦脩)가 그의 선조이고, 조부인 임백근(林百根)은 현령(縣令)이었으며, 부친 임휴(林畦)는 의행(義行)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정국이 어지러워 벼슬길을 달가워하지 않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는 ‘삼청(三淸)’으로 자호(自號)하였다.

무관(武官)인 임영수(林英秀)는, 계사년(1593년)에 경성(京城)에서 순국하게 되고, 그의 아들 임계(林桂)는 복수를 생각하던 차에,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하자 이복남(李福男)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그는 용성(龍城 남원)에서 왜군을 막다 성이 함락되어 전사한다. 임계(林桂)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건 자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식도 아버지를 이어 죽었는데 나 또한 남편을 따르겠다.”하고는 자진(自盡)하였다.
며느리도 같은 날 자진한다. 이후 ‘이괄(李适)의 난’ 때 임계(林桂)의 아들인 임광윤(林光胤)의 명으로 그의 두 아들 임은(林嶾)과 임두(林㞳)는 공주(公州)까지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하였으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임광윤(林光胤)은 군사를 모집하여 가던 중에 화의소식을 듣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에 새겨진 금석문을 통해 4대에 걸친 집안의 사연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는 평택임씨(平澤林氏) 집안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해줘야 한다.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해주고 그 집안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남편이 순국했다고 아내가 따라서 죽는 것은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忠)과 효(孝)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덕목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기초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집안의 희생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기에 엄숙한 마음으로 이러한 일을 전하고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박호련시혜불망비(朴浩連施惠不忘碑), 광주광역시 서구 눌재로 259(서창동 치안센터 맞은편)
사재 털어 빈민구제 뱃사공, 朴浩連

또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西倉洞) 서창치안센터 맞은편에는 〈박호련시혜불망비(朴浩連施惠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서창동이란 동명(洞名)은 조선시대 때 이곳에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인 서창(西倉)이 있었던 데서 비롯한 것이다. 서창에 보관된 세곡은 영산강을 이용하여 영산포의 영산창(榮山倉)으로 옮겨지고, 서울서 내려 온 대형 세곡선에 의해 서울 경창(京倉)으로 올라갔다. 이곳 서창나루터에 뱃사공 박호련(朴浩連)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빚쟁이를 피해 타향을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그는 당시 천한 일이었던 뱃사공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성실히 일한 덕분이었을까 그는 큰 재산을 모으게 되었고,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을 당시 굶주리는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희사를 하였다. 서창면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을축년(1925년)과 기사년(1929년) 두 차례에 걸쳐 비를 세웠다.
비면엔 4자(字)의 운문으로 되어, 네 구(句) 16자(字)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여기저기 나눠주어 가난한 이 구제했네. 모든 사람들이 다 칭송하니, 남기신 덕 날로 새로워라.〔飢思若己 傳施恤貧 萬口咸誦 遺德日新〕”

선정비(善政碑)나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등은 마을을 잘 다스리거나 특별한 은혜가 있을 때 마을사람들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 기념하였던 것인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너무 남발되는 경향도 있었다. 자발적으로 세우기보다 자기 비석을 자기가 세우는 등 덕은 커녕 오히려 민폐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박호련시혜불망비(朴浩連施惠不忘碑)〉를 대하는 마음은 더욱 감동적이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금석문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역사의 흔적인데,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잊혀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해 왜, 무슨 이유로 여기에 세워졌는지 알리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과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이 협력하여 ‘호남기록문화유산 발굴·집대성·콘텐츠화’ 연구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호남기록문화유산을 9개 분야별로, ‘호남기록문화유산 누리집(memoryhonam.co.kr)’에 수록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이러한 사업은 일반 시민들에게 문화유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지역의 문화를 알리고,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금석문을 제공하고 있는 사이트로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누리집(gsm.nricp.go.kr)이 있다. 이 사이트는 동아시아지역의 금석문을 모두 다루고 있어, 지역의 금석문까지 자세하게 수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광주지역의 금석문은 3기에 대해서만 설명과 이미지가 수록되어 있다. 앞으로 중앙과 지역이 연계가 되어서 효율적으로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돌덩이 하나에도 관심 가져야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는 금석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2013년부터 금석문 분야를 ‘호남기록문화유산 발굴·집대성·콘텐츠화’ 사업에 포함시켰다. 전체적으로 호남의 금석문은 그 수를 헤아릴 수는 없으나 통상 3000기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중 20세기 이전의 금석문을 선별하여 300기 탑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호남기록문화유산 누리집(memoryhonam.co.kr)’에는 광주 및 시군별로 이미지를 수록하여 지역별로 금석문을 확인할 수가 있으며, 검색기능을 이용하여 키워드를 통한 찾기도 가능하다. 2013년도에는 나주지역의 금석문, 2014년도에는 광주지역의 금석문 등, 109기의 금석문을 기초 DB화하였고 일부 텍스트와 번역문도 탑재하였다.

호남 금석문의 DB구축은 본 연구실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앞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나갈 것이다. 2015년에는 기존의 탑재된 금석문을 점검하여 수정 보완하고, 비문(碑文)을 중심으로 광주지역의 금석문 30기 탑재하되 이미지와 위치정보 및 설명 수록을 1차 목표로 하고 있다.

금석문은 대개 현장에 있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금석문과 같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은,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하겠지만,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만 관리된다면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효율적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역에 애착을 갖고 있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감시자와 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지역의 문화유산에 대해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혹시 지나가다 비석을 보게 되면, 의례히 세워져 있는 돌덩이로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돌덩이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의문을 던져보길 바란다. 또한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 금석문 관련 정보를 알려주신다면 연구에 소중히 활용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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