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먹거리7. 천년고도 목사골 나주 홍어 이야기(1)
내고향먹거리7. 천년고도 목사골 나주 홍어 이야기(1)
  • 한울 시민기자
  • 승인 2015.05.0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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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산강문화인 마한(馬韓)문화가 꽃피웠던 나주는 크고 작은 문화유적을 곳곳에 품고 있다.
고려 성종(983년)때 설치한 12목 가운데 하나였던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되어 1896년 단발령 후유증으로 광주로 옮겨질 때까지 306명의 나주목사가 부임해 와 호남지방을 다스렸다. 그래서 나주를 천년고도(千年古都) 목사고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학자인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나주가 한양과 닮아 작은 한양(漢陽) 즉, 소경(小京)이라고 적고 있다. 한양의 진산이 삼각산이라면 나주의 진산은 금성산이 있고, 서울의 강이 한강이라면 나주의 강은 영산강이며, 한양에 남산이 있다면 나주에도 남산(451m)이 있으며, 또 한양에는 청계천이 흐른다면 나주에는 나주천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양을 가지 않고 나주에 와서 한양의 모습을 느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이런 나주의 먹거리인 홍어(洪魚)이야기를 전해본다. 홍어의 고향은 흑산도 일대, 물론 서해안 일대에서 잡히지만 옛적에는 흑산 홍어가 대표적 먹거리였다.
목포에서 약 100km 정도의 거리로서, 쾌속선을 타면 뱃길로 두 시간 거리다.
하지만 수년전 일반여객선의 경우 아침 9시에 목포를 출항해 섬 여기저기를 거쳐 오후 해질 무렵에야 도착했던 곳이며, 옛적에는 나라에 큰 죄를 지면 귀양살이로 갔던 곳이다.

흑산도와 영산포는 고려시대부터 인연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
고려 말 섬을 비워버린 공도(空島)정책은 서·남해 해상세력이 삼별초 세력에 동조할 것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해 서·남해 해상세력과 왜구의 연대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조정의 정책이었다. 왜구들의 노략질로 백성들의 생활에 피해가 커지자 진도, 압해도, 흑산도, 장산도, 거제도, 남해도 등 주로 큰 섬들을 공도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어찌 보면 관의 무력함을 노출시킨 정책이었다.

당시 흑산도 사람들이 목포를 경유해 영산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영산포이며, 1970년대 후반까지 목포항에서 운항하는 배가 있었다.
우리의 속담에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사람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면 내뱉는 푸념이다. 홍어는 암컷이 살이 통통하고 맛이 있으며, 수컷은 맛과 고기 살이 빈약하여 가격이 암컷에 비할 바가 못 되어 비교하는 소리다.

전라도 잔칫상에서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 가짓수가 많아도 홍어가 없으면 잔치로 인정하지 않았던 전라도 사람들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십여 년 전만 하여도 홍어를 먹으면 썩은 고기를 먹는다고 타지에서는 기피했던, 온전한 전라도 음식이 바로 이 홍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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