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6)
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6)
  • 제주=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5.07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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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유배생활로 ‘추사체’, ‘세한도’ 명작 남기다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초라한 판잣집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쓸쓸히 서있는 그림 한 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주 유배생활 동안 자신을 믿고 따라주던 이상적의 의리에 대한 고마움의 선물로 탄생하게 된 세한도. 그는 유배생활 중에 최고의 명작을 남겼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는 조선 후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8년 3개월간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도 적거지를 찾아가기 위해 이른 아침 광주공항으로 이동했다. 출발 당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미리 듣고 출발했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도, 유배지로 ‘최적지’

하지만 아름다운 섬의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제주도에 도착한 순간 하늘은 먹구름이 끼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로 급변했다.

<시민의소리> 취재단은 서둘러 추사 김정희의 제주 적거지인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로 발길을 돌렸다. 제주도는 온통 돌로 쌓은 돌담길이 가득해 육지와 다른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적거지에 도착하기 직전 하늘에서 빗방울이 억수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사가 유배를 왔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제주도는 조선시대 가장 유배를 많이 보냈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제주도는 육지와 가장 격리된 곳으로 지리적 여건과 교통이 매우 불편해 죄인들의 유배지로는 최적지였다.

그중 추사가 머물렀던 대정은 제주도에서 가장 험한 지역이었고, 모슬포를 일컬어 ‘못살포(사람이 살지못할)’라고 비하할 정도였다.

추사의 적거지에 도착하자 세한도 속 판잣집 모양을 그대로 한 추사관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지난 2010년 5월 건립된 추사기념관을 설계한 건축가는 세한도 속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 디자인으로 건축했다. 외관은 매우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큰 업적과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다. 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 추사기념관은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이 있다. 또 종가에서 기증한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글씨, 추사 지인들의 편지글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 강진 취재 때 정약용의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만난 현판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어 반가웠다. 기념관 내에는 추사의 동상과 그가 남긴 기록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제주 4.3사건으로 훼손된 유배지 복원되다

하지만 추사기념관은 지금까지 살펴본 강진의 다산기념관, 남해의 유배문학관보다 일반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만할 다양한 시·청각 볼거리가 부족한 듯 했다.

지하 1층에 위치한 추사 기념관을 둘러본 후 건물 밖으로 나오면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를 복원한 강도순의 집터를 볼 수 있다.

김정희가 지낼 장소를 내어준 강도순은 제주에서 강도순의 땅을 밟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제일가는 부자였다고 한다. 강도순은 추사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훼손되어 빈터만 남았다가, 지난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고 한다.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 터라 비를 맞고 있는 유허비와 김정희가 지냈던 초가집은 춥고, 더욱 쓸쓸해보였다.

한때 김정희는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 벼슬을 지내며 막강한 권세를 가진 유능한 학자였다. 그러나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강진 고금도로 유배를 당하면서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순조30년(1830년) 안동 김씨 세력을 탄핵시킨 윤상도가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게 됐고, 그의 아버지는 배후조종 혐의로 유배됐다.

이후 추사 김정희는 55세의 나이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제주로 보내졌다. 그렇게 추사는 8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고립된 제주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됐다.

유배 소재 다양한 체험프로그램 마련해야

그는 유배 초창기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면서 황폐했던 제주 지역의 학문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던 추사는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복원된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추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한쪽 모퉁이에 추사 김정희가 기거했던 모거리 등 3채의 초가집이 모여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는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 중 하나로 추사 유배길을 조명하고 있다.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 프로그램 등 추사 유배길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를 소재로 다양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양진건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장은 “유배라는 원천 자료는 다채로운 각도에서의 조명이 가능한 콘텐츠로 후세의 정신문화에 진지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온 점을 짚어보자면 문화적 변용이 무한하다”며 “이를 공유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이렇듯 어둡고 암울했던 장소로 여겼던 유배지에 남겨진 유배문화의 흔적을 재조명한다면 지역이 내세울 수 있을 색다른 문화관광 콘텐츠로 각광받을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연령층을 고려한 볼거리와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을 만할 체험프로그램이 뒤따라야 주목받는 관광코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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