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5)
남도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5)
  • 남해=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4.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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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유배문한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남해, 노도 전체 활용해 관광자원 만들다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우리나라 고전문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구운몽’이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대표적 국문 소설이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남긴 학자로 한글로 쓴 문학만이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생각을 갖고 한글 소설을 다수 남겼다.

이러한 문학적 가치가 높은 우수한 작품들을 쓴 시기는 유배생활 중에 펜을 들었다. 어떠한 생활을 했기에 저명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까? 서포의 유배생활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그의 마지막 유배지 경상남도 남해를 향해 운전대를 잡았다.

▲남해대교
남해, 호국과 순국을 품고 있는 곳

경남 하동을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는 ‘남해대교’를 지났다. 남해는 호국과 순국의 바다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물결로 일렁였고, 남해입구에서 노량해전의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한 충열사가 반겼다.

남해대교를 건너며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인 남해를 바라보자니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바다와 해안경치가 빼어나 서포 김만중이 유배를 왔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김만중의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시호는 문효(文孝)로 본관은 광산이다. 1650년(효종원년)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9세 나이인 1665년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되어 한때는 유능했던 문인이었다.

그러나 김만중은 유배생활로 생을 마감했던 비운의 학자였다.

서인을 대표하는 학자였던 서포가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장희빈의 청탁으로 조사석이 좌의정이 되었다는 소문을 아뢴 언사의 변으로 1687년 선천으로 유배를 당했다.

이후 풀려나게 됐지만 이듬해 1689년 숙종이 장 씨가 낳은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희빈(禧嬪)으로 삼자 강경한 어조로 이를 반대하고 나서면서 남해로 또다시 유배됐다. 당시 송시열을 비롯해 서인들은 탄핵을 받았고, 바로 이 사건이 기사환국이다.

그렇게 숙종의 눈에 벗어난 김만중 역시 1689년 53세의 나이로 남해로 유배당했지만 3년의 유배생활 끝에 57세(1692)의 나이로 남해 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남해의 노도, 유배인 김만중이 잠들다

그는 남해 섬에서도 1km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노도에서 적적하고 삭막한 유배생활을 했다. 노도는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노를 많이 만들어 노도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삿갓모양을 하고 있어 삿갓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시민의소리>취재진은 김만중이 지냈던 유허지와 허묘가 있는 노도로 들어가기 위해 벽련선착장에 도착했다. 현재 벽련선착장에는 현재 운행배편이 4편뿐이었고, 고정된 시간 이외에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인근 가게에서 낚싯배를 돈 주고 빌려 들어갈 수 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섬으로 유배를 당한 적거지를 찾아 떠날 땐, 현재까지도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만큼 유배지가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인적도 드문 황량한 오지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배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안들 수가 없을 정도다.

그가 지내왔던 노도는 벽련마을과 상당히 가까이 위치해 있어 선착장에서 바라보면 멀리 노도가 바로 보인다. 취재진은 다행히 정기 배편 시간에 맞춰 현재도 20여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고 있는 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도선착장에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를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었다. 김만중은 아무런 인적도 없는 이곳에 도착해서 “내가 도대체 얼마나 잘못을 했기에...”라는 심정으로 비통하고 억울했을까?

현재 문학의 섬 조성사업으로 노도의 곳곳은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노도선착장 입구에도 커다란 건물이 들어설 것으로 보이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취재진은 선착장에서 1km떨어진 거리에 김만중의 허묘로 올라가는 가파른 허묘터로 발길을 돌렸다. 허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200여개가 훌쩍 넘고, 경사가 가파른 편으로 한참동안 숨이 차서 멈출지를 몰랐다. 강진의 다산초당을 올라가는 길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서포는 노도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이곳에 묻혔었다. 현재 허묘 터는 노도의 꼭대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위에서 내려다보며 펼쳐지는 절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 허묘 터라고 가리키는 비석만 있을 뿐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남해 노도에 위치한 서포 김만중의 허묘
▲남해 노도에 위치한 서포 김만중의 복원된 초옥
▲남해 노도에 위치한 서포 김만중의 복원된 초옥
남해, 전국 최초 유배문학관 건립해

이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김만중이 유배된 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쳐서 위리안치 형을 지냈던 초옥이 위치해 있다. 지난 2004년 초옥은 복원되면서 남해군의 노도 문학의 섬 조성을 위한 시발점이 되었다.

현재 남해군은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의 일부를 매입하고, 문학의 섬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비 1,500억여 원을 들여 서포문학관, 민속체험관, 작가창작실, 상징조형물, 하늘데크, 야외정자, 야외전시장, 초옥복원 등을 추진 중에 있다.

노도 섬 전체가 김만중을 기리기 위한 문학의 섬으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최대의 문학관으로 ‘유배’라는 이름을 걸고 전국 최초인 남해유배문학관을 들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남해유배문학관은 남해군청에서 약 1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어 남해 드넓은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남해군 문화관광과 한인규 과장
남해군 문화관광과 한인규 과장과 남해유배문학관 김익주 학예사가 마실 차를 내어주며 반갑게 맞이했다. 한인규 과장은 “남해유배문학관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유배문화를 가지고 문학관을 세운 사례가 됐고, 이제 남해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며 “그런 측면에서 지역경제 활성화가 되는 부분도 있고, 주변 먹거리와 숙박과 연결되면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익주 학예사는 “서포 김만중은 광산 김 씨로 광주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며 “현재 노도에는 유배소공원 조성이 진행중에 있고, 유배문화를 갖고 있는 지자체에서는 각자 공을 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김 학예사는 “건립당시 다른 지역에서도 유배문학관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남해는 발 빠르게 움직이게 되어 차별화된 문학관을 건립 할 수 있었다”며 “보통 기념관이나 박물관 같은 경우는 한번은 가면 꾸준히 매번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소속 지자체장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사후관리 예산이든, 전문 인력 부분에서 관리가 잘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현재 남해유배문학관 내부는 남해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향토역사실, 김만중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유배인의 기록을 볼 수 있는 유배문학실, 실제로 유배객의 심정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조성해놓은 유배체험실, 남해로 온 유배객들만 별도로 모아둔 남해유배문학실, 김만중 특별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다양한 유배 체험프로그램 마련해 ‘관심’

전국 최초의 타이틀인 만큼 유배체험실은 꽤나 방문객들의 관심을 끌만할 소재로 꾸려져있다. 유배체험실로 들어서면 “어명이오, 어명이요, 어명을 받아라”라는 오디오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리고, 형벌에 따라 주리, 곤장, 큰칼의 고통을 체험할 공간이 있으며, 한 사람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복잡한 유배인의 심정을 나레이션으로 독백처럼 연출하여 어두운 조명 속에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도 눈에 뛴다.

하지만 소달구지 함거에 올라가 4D체험으로 유배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시설 점검 중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이외에 전자상소문 쓰기, 위리안치 된 유배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2D플래시 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다.

유배문학관 야외공간에는 분수와 공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사씨남정기 패널, 유배객의초옥을 세트도 만들어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한양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남해로 건너와 유배생활을 지내야만 했던 수많은 유배인들은 절망적인 삶을 문학과 예술로 표현해 소중한 유산으로 유배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남해처럼 지역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잘 활용해서 자원화 시킨다면, 유배문화가 곳곳에 산재된 전남지역에서도 체험프로그램 등을 개발해 지역경제에 기여하고 주목받는 지역 문화관광자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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