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3)-상
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3)-상
  • 강진=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4.15 1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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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사의재, 보은산방, 이학래의 집, 다산초당 등 유적지 보존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고려청자가 유명하고 토하젓이 일품이라고 잘 알려진 전남 강진. 강진은 지리적으로도 나주, 영암, 해남, 장흥, 보성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전라도의 중요한 길목이다.

강진은 바다와 육지로 둘러 쌓여 있지만 멋이 있는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강진은 남도답사 1번지라고 칭하며 가장 먼저 다루기도 했다.

이렇게 강진의 자랑거리가 정말 많지만 빠지지 않고 말하는 것이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정약용 그는 누구인가?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개혁을 주장, 조선실학을 집대성 하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 녹로(도르래)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해 건축에 도움이 되었다.

▲따사로운 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사의재
집안 전체 흔들었던 유배생활

당대 최고의 지식이었던 정약용은 신유박해로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났다. 다산의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당하고,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당하고, 그 역시 강진에서 약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됐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의 마지막 유배생활을 들여다보기 위해 강진으로 떠났다.

구름 한 점 없는 만연한 봄 날씨 속에 벚꽃 나무가 줄지어 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해서 첫 번째 묵은 곳은 강진군청에서 차로 3분 거리인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에 위치한 사의재(四宜薺)다.

강진군 정연희 문화관광해설사는 “다산은 강진이 유배지였지만, 유배 형태가 한 공간에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강진 현을 전부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었다”며 “당시 읍성 안에는 천인들이나 죄지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읍성의 동문 밖에 있는 주막에 겨우 거처를 얻어 생활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강진군 김동남 문화예술팀장(왼쪽), 정연희 문화관광해설사(오른쪽)
▲동문 밖 주막에 위치한 사의재
그는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 동문 밖 주막에서 1801년부터 1805년까지 4년간 기거했다. 주막집 주인 할머니와 딸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게 됐다.

이후 다산은 자신이 지내왔던 골방을 ‘네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으로 사의재라 칭했다. 자신의 생각, 용모, 언어,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사의재 옆에는 실제 자리 터가 있다. 정약용이 유배를 와서 지냈을 때부터 있었던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서서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보은산이 쭉 일렬로 팔 벌려 있는 것 같은 형세로 아래에 사의재가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안정감이 느껴진다. 현재 사의재는 강진군이 오랜 고증을 거쳐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 집터를 원형 그대로 2007년 초여름에 복원했고, 현판의 글씨는 다산 선생의 친필을 집자한 것이다.

유배문화로 숙박 시설, 먹거리 시설 마련

정말 복원을 잘해 놓았다. 입구부터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 코스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고, 사의재 내부는 다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정감 있고 세세하게 표현해 놓았다. 사의재 문을 열어보면 다산이 사용한 듯한 책상과 옷가지, 덮었던 이불 등을 그대로 복원해 조선시대의 느낌이 물씬 난다.

사의재에 앉아 보니 다산이 앉아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낯선 땅에 도착해 다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한때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며 성공하고 있던 그가 실의에 빠져 있을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지만 이곳 동문 밖 주막 주모와 딸의 도움으로 다산 선생이 마음을 잡고 교육과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 실의를 극복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해 저서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이곳 주막 뒤편에는 한옥으로 된 펜션이 있다. 그 안에는 강진군에서 다산이 위대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할머니의 뜻을 기리고자 주모상을 세웠다.

강진군에서 동문매반가의 옛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이곳을 민간에게 위탁하여 파전, 동동주 등 토속 음식을 판매하는 현대판 주막으로 운영하고 있다.

정약용은 4년간 사의재에서 보내다 고성사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성사는 백련사에 딸린 암자였다. 강진군청에서 차로 10~15분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고성사를 올라가는 길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오른편에 위치한 저수지 인근에는 유채꽃이 만개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었다.

그 위로 경사가 심한 길 끝에 오르면 보은산방이 있다. 작은 절이기에 고요하고 산위에 있어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올라가자마자 아래로 보이는 경치를 보자니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곳곳에는 흰색, 노란색 꽃들이 만개해 보이고 따사로운 햇살과 반짝반짝 빛나는 저수지, 멀리보이는 풍경들이 눈을 멈추게 했다.

▲고성사 보은산방
▲보은산방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정약용, 위대한 업적 나오게 한 다산초당

다산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도움을 준 사람은 아암(兒菴) 혜장선사(1772∼1811)였다. 그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혜장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그 고마움에 다산은 이곳을 ‘보은산방’이라 부르고 9개월을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다산의 큰아들 학유와 주역 연구를 했다.

다산은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보고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며, 아들과 강진읍의 6제자와 함께 밤이 새는 줄 몰랐던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보은산방에서 내려온 다산은 강진읍 목리 이학래의 집에서 2년 넘게 얹혀살다가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1818년 9월 해배(解配)될 때까지 10년 넘게 살게 된다. 다산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거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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