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묻혀서
책 속에 묻혀서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5.04.15 1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어떤 고서 수집가가 일본으로부터 고려 말 충신으로 이름난 정몽주의 친필 편지 한통을 입수했다고 한다. 소개된 그 내용을 보니 아마도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데, 편지 끄트머리에 ‘빌려간 책을 돌려다오.’라고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 옛날에도 빌려간 책을 잘 안돌려 주는 사람들이 있어 꽤나 속으로 애를 끓는 독서가들이 더러 있었나보다. 흔히 먹물들의 책 욕심이라는 것은 지병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된다. 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까지도 나도는 형편이니 책이란 것의 마력은 달리 형용할 길이 없을 듯하다.

아닌 말로 책을 귀히 여기듯이, 책을 모으듯이, 돈을 모았다면 어쩌면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유작작하게 지낼 정도는 되었을 터이다. 책은 나 같이 흰소리나 하는 서생들에게는 현실의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가상 세계에서 노니는 열락을 준다. 요즘은 그런 책 대신 인터넷이라는 괴물이 등장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늘 무엇엔가 ‘연결 상태’가 아니면 불안해하는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지만.
수천 권의 책들을 다 읽을 수도 없을 터인데 이사 가기도 불편하고, 정리하기도 힘들다며 아내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실인즉 나도 아내 등쌀에 책을 모조리 처분해버릴까 하다가 결국 반나마 뽑아 어느 학교로 보내고는 아직도 한 짐을 가지고 있다.

죄 없애지 못하는 까닭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는 기분이 백화점에서 명품 옷이나 가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여성의 마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서다. 호사스런 기분, 마음 든든한 기분, 위로받는 기분, 다른 세계에 사는 기분. 그런 황홀한 느낌 때문에 차마 다 처분하지 못하고 있다.
책 한권마다에서 그 책을 사거나 손에 넣었던 때의 기억들이 반짝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내 지난날의 기억이 묻은 책을 쉽게 내놓을 수가 있으랴 싶다.

결혼 초에 나는 어느 스님의 선방이 부러워서 그 흉내를 내려고 네 벽의 벽지를 창호지로 바르고, 방바닥에는 밥상 같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 하나와 방석 하나만을 놓고 살 작정이었다. 그 책상 위에는 원고지와 볼펜, 그리고 릴케의 시집 한 권.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아내의 강력한 반대, 당신이 지금 절간에 와 있는 줄 아느냐, 이렇게 살 거면 결혼은 왜 했느냐, 다툼 끝에 내가 지고 말았다. 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로 내 책 살림이 늘어나 집안에 책들이 성을 쌓았다.
사실 그 시절 건방진 생각으로는 세상의 모든 책이란 흰소리로 생각되었고, 나는 직장에 갔다 오면 장판방에 댕그러니 놓인 앉은뱅이 책상을 앞에 두고 원고지의 빈 칸을 메우거나 릴케를 읽거나 명상을 하면서 극단적으로 단출하게 살 작정이었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책은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이것이 내 소회다. 이즈음에는 자연과학에 빠져 양자역학이나 지리학 같은 것에 흥미를 쏟고 있다. 그런데 대체 앞으로 내가 몇 년간이나 살아야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가 있을까.
허균 역시 대단한 독서가였던 모양이다. 연경에 가는 외교사절 수행원을 따라 가면서 집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4천여 권의 책을 사왔다고 한다. 소부 허유가 속세를 떠나 점점 더 깊은 산골짜기로 거처를 옮겨갔듯이 책에 점점 깊이 빠져서 사는 고독한 삶도 꽤나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책 읽기 좋아하는 것을 농사짓는 일보다 더 낫게 볼 생각은 없으나 시름 많은 세상살이를 벗어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가상 세계로 자리를 옮겨 지내는 재미도 무시할 수는 없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