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생활의학과 조국통일 위해 평생을 살았건만
민족생활의학과 조국통일 위해 평생을 살았건만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5.04.02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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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해관 장두석, “하늘이나 어디에도 내 죄를 고할 길이 없다”

故 해관 장두석 선생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도 조국의 통일도 이루지 못하여 하늘에 죄를 지었으니 빌 곳이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해관 장두석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민족생활의학과 조국통일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故 해관 장두석 선생의 양현당(養賢堂)을 지난달 31일 찾았다. 장례를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사람들을 위해 고인의 부인인 김동례 여사가 저녁을 대접하는 자리였다.

양현당에는 고인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평소 즐겼던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도포자락 휘날리며’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한쪽 벽면에 걸린 ‘단군민족(檀君民族) 대동단결(大同團結), 반전평화(反戰平和) 조국통일(祖國統一)’이란 글귀의 족자가 눈에 들어온다. 평생을 빚으로 여기며 살게 했던, 그리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아 영면의 순간에서 마저 고인에게 “죄를 고할 길이 없다”고 토로하게 했던 그 글귀가 가슴을 후벼 판다.

고인의 평생 염원이었던 글귀
고인은 일제말기와 8.15해방공간,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의 비극과 함께 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고인의 철학이 되어 이후 민주화와 조국통일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인은 일제 말기(1938년) 전남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학당마을에서 아버지 장기옥, 어머니 김순례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다.

소년 빨치산, 장두석

일본이 패망하기 몇 달 전인 1945년 5월, 화순 이서소학교 2학년이었던 고인은 “일본놈들이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여 우리는 먹고 살기에도 힘들다”는 연설을 한 때문에 걷지도 못할 정도로 매타작을 당한 뒤, “더러운 일본놈 학교 다니지 말자”며 자퇴한다.

1950년 7월께 학당마을 소년단의 단장이 된다. 소년 빨치산이 된 고인은 인민학교에서 훗날 경제학자이자 ‘민족경제론’의 저자인 박현채를 만난다. 이 무렵 서양화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오지호 화백도 박현채의 소개로 대면한다.

군경토벌작전을 피해 숨어 다니다가 1952년 2월, 고인은 지리산 달궁에서 체포된다. 유격대원이었지만 15

박현채 교수
살의 어린 소년임을 감안했음인지 고인은 9일째 되는 날 풀려난다.

고인은 전쟁 중 유격대 생활과 일종의 난민 생활에서 촉발된 극심한 폐수종과 간장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된다. 광주의 모든 병원에서 ‘죽는다’는 진단을 받은 고인은 전남 화순 옹성산 적벽토굴로 들어가 산과 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회한의 아픔과 병원균을 몰아낸다.

그리하여 고인은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고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한(恨)으로 기인된 아픔, 혹은 육신과 정신의 곳곳에 ‘맺혀있는 그것’을 노래와 춤과 북장고로 다스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또한 병을 낫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인은 지인들과 술판을 벌일 때면 노들강변이나 도라지타령으로 시작해서 진도아리랑으로 끝을 맺을 정도로 ‘흥’을 중시했다.

통일이 되어야 ‘민족병’에서 해방

이와 같은 고인의 자연건강비법은 물이 흐르듯 살아야 하고, 또 물이 흐르듯이 분단된 이 나라도 통일이 되어야 모든 사람들이 ‘분단병=민족병’에서 해방된다는 사회철학 혹은 역사철학으로 발전한다. 몸의 건강은 역사의 건강에서, 역사 또한 몸의 건강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선재 민족생활교육원장은 고인의 말을 빌어 “현대병은 우리의 체질과 풍토에 맞지 않는 서구식 식의주 생활에서 오는 습관병으로 우리가 제 정신을 잃어버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서 생긴 정신병, 미제병, 분단병, 문화병, 역사병이다”며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한민족 정신을 가지고 한민족답게 생활하면 모든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고인은 평생 ‘민족혼’을 되찾고, 통일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이는 고인의 삶의 궤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1956년, 고인은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에 들어가 광주도당 청년당원으로 활동한다. 1960년, ‘3.15부정선거’때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친다. 5인조 내지는 9인조로 조직을 만들어 이승만의 일당독재정권 타도와 부정선거 저지 투쟁에 나선다.

화순 이서면 지서에서 격렬하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화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광주 동명동 형무소(교도소)로 이송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4.19혁명의 결과로 풀려난 고인은 1961년 2월 민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들어가 통일운동을 펼친다.

5.16이 터지면서 고인은 전국을 돌며 도피와 잠행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1966년 고향으로 돌아온 고인은 그가 소년시절 빨치산으로 넘나들었던 화순 북면 송단리 백아산 자락, 지금의 동초등학교에 ‘야간민족학교’를 설립한다.

1974년에는 삼애신협을 만들어 초대 이사장이 된다. 그해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고, 유신시대의 최고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터진다. 고인은 독재에 맞서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한다.

‘자연건강대학’ 설립, 전국을 돌며 건강교육

1975년 민족생활학교의 전신인 ‘자연건강대학’을 설립, 1988년까지 전국을 돌며 건강교육을 전개한다. 1976년 계림신협 부이사장이 되어 조합원 교육에 열성을 쏟으면서 가톨릭농민회에 입문, 농민운동을 시작한다. 그해 저 유명한 ‘함평고구마사건’에 깊이 관여한다.

1978년에는 전일빌딩 뒤 YWCA 2층에 광주양서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양서조합에서 책자발간과 지하유인물 등을 만들어 배포한 고인은 광주엠네스티 회원으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수감자들에 대한 구명운동 등을 벌인다.

고인의 민주화 투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79년 11월 14일에 행해진 ‘명동YWCA위장결혼사건’의 연장선상에서 계획된 ‘광주YWCA위장결혼’이 사전에 발각돼 505보안대로 잡혀 들어가는 등 민주화 투쟁에 적극 앞장선다.

1980년 5월, ‘죽음의 행진’ 단행

1980년 5월, 고인은 ‘5.18광주항쟁’의 최전선에 선다. 고인은 광주시민군이 5월 21일 접수한 전남도청 안에 설치된 ‘수습대책위원회’로 들어간다. 그러던 5월 26일 새벽 4시, 계엄군의 광주 무력진압을 항의․저지하고자 전남도청에서 화정동 군 바리게이트 앞까지 다른 수습위원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단행한다.

5월 27일 새벽 1시 무렵, 젊은이들의 권유로 전남도청을 빠져나온 고인은 6월 26일 ‘자수형태’로 화정동 소재 505보안대로 들어가 갇힌다. 505보안대 지하실에서 36일간 갇혀 온갖 조사와 고문을 받던 고인은 공군헌병대, 상무대 영창(5소대), 상무대 영창(7소대), 화정동 육군77병원, 광주교도소, 31사단 영창 등을 거쳐 1981년 4월 13일 사면․석방된다.

1981년 사면되어 풀려난 고인의 ‘오월투쟁’은 계속된다. 5.18위령탑건립 논의, 오월영령 제사모시기 등을 이어간다. 그런 와중에 1985년 4월 30일, ‘사전영장’의 형식으로 다시 구속된다. 광주교도소 3사 2층에 갇혀 옥살이를 하다가 1985년 8월 중순께 선고유예로 풀려난 고인은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 중앙조직 및 광주조직 재건에 참여한다.

유족들은 “80년 5월 광주항쟁 때 끌려가 혹사당한 뒤 병을 얻었다”고 말한다. 20여년 전부터 간암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고인은 암을 안고 다스리며 살아왔다고 한다.

고인의 큰아들인 장영철 (재)해관문화재단 이사장은 “20년전 간암을, 15년전에는 당뇨를 앓았던 당신이 직접 단식, 과음, 흡연 등으로 실험하면서 자연건강법으로 병을 다스렸다”며 “‘암환자가 암환자를 고치지, 암환자가 아닌 사람은 암환자를 절대 못고친다’는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평소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약이나 의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며 “생활 속에서 자연 건강법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평소 즐겼던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도포자락 휘날리며’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민주와 통일위해 말이 아닌 발로 뛴 33년

이후 1982년부터 고인이 맡은 중책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광주가톨릭농민회장 및 가농전국본부 수석감사(1982년), 계림신협 노인대학강좌 7년 운영 및 광주환경공해연구소 설립(1989년), 민족생활학교 개설(1989년), 해외초청 자연건강법 강의(독일, 중국, 인도, 일보, 캐나다 등) 및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참여(1991년), 신협광주연합회 부회장(1992년), 4월혁명회 이사(1993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공동대표(1995년), 적벽기념사업회 설립 회장(1995년), 우리민족서로돕는아침안먹기운동본부 발족 모금운동(1998년), 장기수어른들의 삶터 광주 ‘통일의 집’ 마련(1998년), ‘민족생활신문’ 발행(1998년), (사)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1999년), 태평양전쟁 광주유족회 후원회장(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대표 및 민족문제연구소 이사(2000년), 통일연대 공동대표(2002년), 백두산 통일기원천제 봉행 및 국토순례통일기원제(2003년), 적벽축제 거행(2003년), 실학자 규남 하백원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2003년), (사)국조단군승모회 총집행위원장(2006~2007년), 평양 능라도 농촌탁아소, 유치원 콩우유기계 설치 후원(2006년), 배달문화선양회 설립(2007년), 북녘수재민돕기 모금운동(2007년) 등의 활동을 통해 민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선생은 그 기백이 대륙적이었다. 그의 팔은 안으로 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팔을 있는 대로 활짝 벌려 다 내주었다”며 “선생은 상처투성이였으되 그 생채기는 쉽게 잊으셨다. 하지만 그 원한만큼은 불같은 실천력으로 재조직하는 예인이었다. 그 갓대(증거)로 구질구질하고 쩨쩨한 생각 따위는 그 티도 보이질 않았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2011년 화순군 이서면 인계리 용당마을에 한옥형 민족생활교육원인 양현당을 완공한 뒤 민족생활의학을 강습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문화·전통사상·역사·환경·예의범절·세시풍속 등 다양한 강좌도 열었다.

2014년 10월 2일, 남북민족정신선양회 회원 20명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평양 단군릉에서 단군제 봉행 행사를 열고 돌아와 건강에 이상증세를 느낀 뒤, 석달 전께부터 걷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다.

2~3년전부터 죽음 예비...장례까지 꼼꼼히 챙겨

그러면서도 고인은 죽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예비했다고 한다.

장영철 이사장은 “2~3년 전부터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며 “2012년 ‘병은 없다’를, 최근엔 소책자인 ‘건강생활수첩’을 발간한데 이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편집을 독려한 ‘가정생활보감’은 돌아가신 바로 다음날 출간됐다. 올 1월부터 시작된 ‘생명살림 대강연회’의 제주도 강연을 휠체어에 의지해 마무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 죽거든 슬퍼하지 마라. 나는 하늘이나 어디에도 내 죄를 고할 길이 없다. 독재자처럼 굴며 너희들을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이 모든 것 용서를 빌고 간다. 눈물 흘리지 말고 장례는 축제를 벌여라. 4일장으로 치르고 사람이 오기 편한 곳으로 장례식장을 잡아라. 지지고 볶는 음식은 하지 말고 홍어, 나물 등으로 대접하라”며 마지막 장례까지 꼼꼼히 챙겼다고 전했다.

고인의 장례는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졌다. 화순 양현당에서 노제를 거쳐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영결식을 치룬 후, 8묘역에 안치됐다.

고인이 평생 빚으로 안고 살았던 민주화와 조국통일의 과제는 이제 양현당의 후학들에게로 넘어갔다. 양현당의 뜻대로 어진 인재들이 고인이 늘 꿈꾸었던 ‘단군민족(檀君民族) 대동단결(大同團結), 반전평화(反戰平和) 조국통일(祖國統一)’의 유지를 이어가길 기대해본다.

평소 해관 장두석 선생을 흠모했던 사람들, 장례를 회고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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