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속도가 아니면 잊을 수 없는 것
꽃의 속도가 아니면 잊을 수 없는 것
  • 김정희 지역문화교류재단 운영위원장/ 시민기자
  • 승인 2015.03.24 0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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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을 부탁해요’ 오견규, 한희원, 박태후 3인 초대전
▲ 지역문화교류재단 운영위원장/ 시민기자

어김없이 봄이 왔다. ‘봄날을 부탁해요’ -
경어체의 전시회 제목이 주는 아련한 향수에 이끌려 3월의 이른 봄날 로터스 갤러리를 찾았다. 절 마당 한편에 희고 눈부신 매화의 개화는 은은한 절창이다. 겨우내 닫아두었던 꿈이 현실의 풍경으로 다가서며 봄은 소중한 비밀을 사방에 흩어 놓고 있다.

도심 속 사찰에 자리 잡은 로터스 갤러리는 문화도시 광주의 지역성을 주목하게 하는 공간이다. 예전 이곳에는 군인들이 일정 과정을 마치려면 거쳐 가야 하는 군부대가 있었다. 하지만 군부대가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며 갤러리 주변은 사철 꽃들이 피는 공원 숲길로 조성되어 도심 속 휴식과 놀이의 상징 공간으로 바뀌었다.

갤러리에는 미리 연락드린 목운 오견규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재작년 ‘갤러리 GMA' 기획 초대전 ’봄꽃에 머물다‘에서 느낀 사유와 절제, 담백한 색감의 풍경을 떠올리니 또 다른 변화가 기대되기도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입구의 찻집에서 차를 나누며 오견규, 한희원, 박태후 -지역 화단에서 한국화, 서양화, 문인화를 대표하는 3인의 작가들이 봄날 초대전을 개최하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풍경을 읽는 시선은 각기 다르지만 세 사람의 작가들은 이전에도 몇 차례 공동 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제 막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3월과 4월 사이 이 낭만(?)적인 전시회를 기획한 이이남 작가는 ’세 분 초대 작가들을 통해 긴 기다림 후에 캔버스와 화선지에 봄꽃이 피는 신비로움 그 시너지 효과를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다.’며 ‘올 한해 로터스 갤러리의 전시기획을 맡아 즐겁고 생생한 설레임을 느끼며 다음 기획전들을 기대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세 화가의 화실에서 걸어 나온 봄은 강렬한 화려함과 더러는 지독한 그리움, 무(無), 침묵으로 채색된 은밀한 언어로 다가왔다. 화가는 붓끝으로 꽃망울을 머금게 하고 봄꽃들은 이곳 전시실 벽면을 꼭 쥔 채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한희원 화가는 ‘꽃으로 맞아 / 몸이 멍들 때/ 꽃으로 맞아 영혼이 멍들 때…’ 라고 자신의 시를 그림 옆에 적어 놓았다.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花 花中有詩)’ -노랗고 붉고 하얀 꽃들의 세상, 화폭에 담긴 강한 터치의 꽃들은 고결한 아름다움으로 눈부셨지만 마음은 시를 감상하듯 오히려 차분해졌다. 겨우내 차가운 흙을 한줌씩 밀고 물을 빨아 들여 꽃이 핀다.
캔버스에 저 서정의 꽃을 피우기까지 화가의 시간은 얼마나 더디게 흘렀을까. 그림 앞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읽는다. 빛을 품은 색채의 환상적 흐름과 낯선 그리움이 교차되는 ‘생의 꽃날’- 오, 봄꽃이여! 누가 너보다 더 높은 곳에 살고 있다 말하겠는가.

가느다란 발목으로 분홍 꽃그늘 아래 종종종 서있는 새들의 고요- 박태후 화가의 ‘자연 속으로’는 보일 듯 말 듯 붉은 매화 꽃잎이 밀어내는 바람소리와 청명한 봄 햇살이 물결처럼 섞여서 조용히 흔들린다. 누가 이 꽃들을 한꺼번에 피워서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세상의 봄날을 만들었을까.
참으로 경이롭다. 날아가 버리지 않고 전깃줄에 일렬로 줄지어 졸고(?)있는 먹빛 참새는 더러는 제 이름을 부르며 ‘짹짹’ 인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성실한 접근과 독창성은 우리를 상념의 세계로 이끌기도 하고 때론 명상하게 한다.

그다지 넓지 않은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 와르르 붉게 핀 매화와 동백, 그림속의 한 소년을 만난다. 여백이 있는 동백 앞에서 꽃을 들고 순진하게 서있는 소년은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같은 차림이다. 그림속의 소년이 선비 화가라 불리는 오견규 화가의 분신일거라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일생묵노(一生墨奴)’ 평생의 스승이셨던 아산 조방원 선생의 가르침을 새기며 근본을 담은 예술을 지키려는 그의 그림들은 기교를 부리지 않았지만 절제와 여백으로 오히려 충만함이 느껴진다. 삶을 간소하게 하면 일상의 소중한 것들은 그렇게 돌아오리라.

전시장을 나서며 문득 꽃걸음이 그리 더딘 것은 ‘세상에는 꽃의 속도로 잊어야 할 것들이 있어서/ 꽃의 속도가 아니면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라는 싯귀가 떠올랐다. 그렇게 겨울은 우리를 지나갔고 우리는 무각사 갤러리에서 디지털 세상 밖의 감미로운 봄날을 만났다. 이제 여러분이 직접 산책 나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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