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12)
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12)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5.02.0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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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싸움만 하고 지지 않는 전쟁을 하는 군대란 있을 수 없겠지만, 토벌하는 군대가 갖는 위기감과 쫒기면서 토벌 당하는 군대와 군인이 갖는 위기감이 천양지차일 것은 너무나 뻔하다.

쫒기는 싸움을 하고 싶은 군인은 어느 세상에도 있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의병이고 안규홍이었다. ‘국민 되기는 일반인데, 나라일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리오’하고 삶에 대한 공적인 자각으로 생명마저 초개같이 버리는 사람들이 의병이고 담살이 장군 안규홍이었다.

나라가 위급한 때이고 공화국이 위태롭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을 버리거나 희생을 자초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들은 오늘에 이어지고 역사는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간재 전우와는 조금 다르게 유학자 의병대장 유인석은 한말의 위기적 상황에서 선비들의 행동지침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것, 은둔하여 옛것을 지키는 것,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루는 세가지 길을 제시하여, 은둔하여 옛것을 지키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유인석이 아니더라도 조선 중화주의라 할 수 있는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따라 명나라에 대해 의리를 다하는 것이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당시의 사상계를 장악한 노론 정파의 이데올로기였다.

주자가 살았던 송나라가 일시적이며 가변적인 기(氣)의 작용으로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고 있지만, 불변의 원리로서의 리(理)인 중화는 결코 꺽이지 않는다는 중화문화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주자의 이기론이 소중화를 자부하는 조선에도 그대로 관철될 수 있었다. 일본의 침략은 일시적 가변적 기(氣)의 작용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었고 임진왜란도 결국 주자의 모국, 중국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연하자면 천리를 방해하는 사람의 욕심을 해소하기 위한 주자학의 수양론은 자아를 공(公)이라는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었다. 사사로운 경계를 뛰어 넘어야 가천하( 家天下)와 공천하(公天下)가 융합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분할 불가능한 일원론의 원칙으로 결합되어 공공(公共)의 것이 개인 가족 국가 천하의 모든 영역과 단위를 관통하면서 천리(天理)가 밝게 되어 천리지공(天理至公)이 달성되는 것이었다.

성리학이 관철되는 조선 사회에 있어서 왕과 사족들의 지배성을 표현하는 공(公)은 그들 자신조차도 구속하는 보편적 준칙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청빈은 공인들의 도덕성의 원천이었다.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으로 거명되는 청백리들의 삶과 풍모는 후생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체제의 관심과 돌봄에서 완전 소외된 계층일 수 없는 양반계층이면서도 더욱 두드러진 양반들이었다.

정통 주자학으로 수양한 지배계층이 주류인 후기 조선에서 삼정의 문란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의 삶이 관리와 서원의 탐학에서 비롯되었음을 돌아볼 때, 생존의 욕구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삶의 현실에서, 하늘의 북극성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가치를 가지고 지배 엘리트 집단을 자발적으로 훈련하고 설득할지라도, 그들의 생래적인 사람 된 욕망을 제거할 수는 없었고, 그 결과 지극한 천리(天理)의 공공성은 환상이었고, 그 환상에 의존하는 공동체나 국가의 안녕에 대한 희망은 자기기만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송나라의 멸망과 조선의 멸망이 그것을 증명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화한 자본주의하에서 원칙 없는 경쟁까지도 정당화되어 가는 지금, 모든 영역과 단위에서 존재의 토대에 균열을 가져오는 인욕(人慾)의 난무는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 주자의 인욕을 멸하고 천리를 세우는 절대화에서 한걸음 후퇴해서, 공자의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마라’ 가 인욕과 천리의 균형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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