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사 전상의 장군의 사당 건립배경에 대해서
충민사 전상의 장군의 사당 건립배경에 대해서
  • 신문식 시민기자
  • 승인 2014.12.2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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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전 남구 문화원장에게 듣는다

▲ 이종일 전 남구문화원장

세상에는 잘못된 오해로 인해서 왜곡된 역사가 전해지는 사례를 많이 본다. 이런 왜곡된 역사는 왜 그렇게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본인들이 직접 보지 못하고 잘못 전달하기 때문에, 아니면 직접 서책을 보지 않고 남의 입을 통해서 잘못 전달된 정보를 믿어버리는 경우가 결국 오해와 진실로 구성되는 역사가 많다는 것이다.

광주에는 역사적으로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14명의 충신이 있다. 그중에서 삼 충신(전상의. 고경명. 김덕령)의 한 분인 전상의 장군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장군이었으며 정통 무과에 급제한 광주 구동출신의 장군이었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전상의 장군은 1567년에 태어나서 1603년 선조 36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충무위 사복장. 함경도 갑산 만호장. 평안도 개천 군수 등을 많은 관직을 거쳐 1627년 인조 5년 구성부사. 좌영장을 겸한 장군으로 청나라가 침입하자 안주성 백성루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광주 출신의 충신이었다.

그 당시 청나라 야인들이 침입하여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홍. 안주 목사 김준과 함께 청나라 군사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어디서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전상의 장군의 사실적 진실한 역사기록이다.

이종일 전 남구 문화원장에게 충민사 건립 배경과 왜곡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 원장은 당시 광주시 문화계장이었다. 오해는 전상의 장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같은 일가로 조상숭조 성역사업이라는 잘못된 정보로 비화하면서 왜곡된 오해가 있었다.

▲ 유물관
▲ 인사동골동품 시장에 나왔던 유물 모조품이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박병삼이 기증하여 유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전상의 장군은 죽어서도 오죽했으면 실록 찬수관 이엽의 꿈에 나타나 김덕령과 고경명은 사당에서 제사를 받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도록 소원을 말했을까?

광주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록 찬수관 이엽이 광주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 실록 속에서 종이에 눌러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애석한 일이었다.

이엽은 전상의 장군의 꿈을 꾸고 나서 항상 머리에는 전상의 장군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광주에 낙향해서 유림회의를 거쳐서 포충사에 모시기로 했으나 포충사는 신주를 모실 공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일피일 늦어진 것이다.

날씨가 제법 풀린 날 이종일 전 남구원장을 만났다. 요즘 근황은요? 하고 물었다. “요즘은 건강관리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연 요청이 있으면 나가고, 단군숭모제, 사진동호회 회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전상의 장군과 충민사 건립배경 이야기를 알고 싶습니다. 전상의 장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같은 일가인가요?”하고 물었다. 이 원장은 “절대 한집안 일가가 아닙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완산 전씨이고,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씨입니다. 어떻게 한 집안이며, 일가이겠습니까? 전상의 장군의 사당 건립은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전상의 장군 유족보존회를 만들어서 완공(1985년)할 때까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모조품을 제작 기증하여유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전상의 장군은 정통 무관급제해서 벼슬하신 장군입니다. 그러나 자손이 미약하고 시운을 만나지 못하고 이엽과 같은 사람을 늦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과 친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세상 인심을 많이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충민사 사당 건립 배경과 공적비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1975년에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경열사에 8분 중에 모셔졌던 한 분이 전상의 장군입니다. 그런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그 당시 전라도에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 통일신라 최치원을 모셔졌던 정읍의 무성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8분이 모셔졌던 경열사도 자동 철폐되었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유림들이 서원복원을 시작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일본강점기에 사당 건립은 허락되었는가요?” 하고 물었더니,

이 원장은 “일제는 조선은 아니잖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포충사나 충장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건립된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지금의 경열사는 1980년 5.18 치유사업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새로 건립된 경열사는 정지 장군 후손들이 정지 장군 한 분만 모시고 일곱 분을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경제력과 문중이 튼튼한 후손들은 개인적으로 사당을 건축하기 시작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도 전상의 장군의 불운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나는 전상의 장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교육청 신문에 게재했으며 전상의 장군 유족 문중에 논문을 보냈습니다. 논문은 전상의 장군의 실기를 중심으로 논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실기라는 것은 전상의 장군에 대한 많은 분의 기록을 집대성한 기록물인데 1700년경에 제작된 것입니다. 그 기록을 중심으로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원장님, 전상의 장군 유족들도 충장사나 포충사 사당을 건립하는 것을 봤을 것인데, 왜 그 당시까지 건립을 못 하고 있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이 원장은 “옛날에 양자로 들인 후손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영민하고 부유하게 활동했던 분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집안이 잘 되려면 후손들이 잘되어야 조상님들이 빛을 낸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자식걱정을 하면서 잘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모조품을 제작하여 기증한 목록.

이어서 이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족들은 나의 논문을 보고는 유림들과 전상의 장군 유족들이 유족보존회를 구성하여 건립계획을 세웠습니다. 보존회에서는 사당 건립사업계획을 세우고 문화재 보존지구로 터를 잡고 매입하였습니다. 분주하게 활동을 했지요.” 하시면서, 입술이 마른 것 같아서 “음료수를 한 잔 하실까요?” 말했으나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서, “첫 사업으로 지금의 충민사 입구 좌측에 신도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게 됩니다. 이때도 전상의 장군의 시운은 먹구름이었습니다. 충신은 죽은 후에도 충신으로 숭모해야 하는데 시절이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로 인해서 혼란한 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관을 중심으로 사당 건립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자칭하며 무관 사당은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연두순시에서 우리 정부는 문민정부다. 무관 사당은 건립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족보존회에서는 매우 난감했습니다. 시작은 열심히 분주하게 활동을 했으나 정부의 지원이 막혔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전라남도는 김종호 도지사였으며 광주시장은 김양배 시장이었습니다. 김종호 도지사도 정부의 방침에 어쩔 수가 없었고 전상의 장군 유족보존회도 난감했었지요. 그 당시 김종호 도지사나 김양배 시장도 전두환 대통령과 전상의 장군은 같은 일가인 줄만 알았으며 연두순시 차 광주에 오면 전상의 장군의 사당이 없으면 한편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광주 출신 전부일 장군과 김종호 도지사는 군대생활 할 때 인간관계가 깊었던 분들입니다. 그 때문에 정부에서 지원을 안 해주면 도비로 겁립하자고 해도 반대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 당시 80년대는 전상의 장군 사당 건립명분도 충분하였고 삼 충신 중에 한 분만 사당이 없었으므로 건립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으므로 허락한 것입니다.

김종호 도지사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관심 밖이 되었을 줄 모릅니다. 김종호 도지사의 덕분이었습니다. 김종호 도시사의 결단과 도비와 시비로 건립한 충민사는 전상의 장군의 사당입니다. 시민들의 깊은 관심과 애정, 그리고 숭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일 처음에 사당을 건립 할 때는 사당과 동.서제 등 다른 사당과 똑같은 형태로 건립하려 했으나 사실상 동.서제는 필요가 별로 없었으므로 유물관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사당의 크기는 20평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덕령 장군의 사당이 23평입니다. 김양배 시장께서 현직 대통령의 일가이므로 25평으로 하자고 해서 25평이 된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당을 건립하고 유물관을 건립할 즈음에 유물관에 전시할 유품이 인사동 골통품 시장에 나온 것입니다.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인 전경환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선조 유품이 나왔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해서 전경환이가 인수를 해서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어찌했던 간에 충민사는 불운의 고통을 걲으면서 독자적으로 전상의 장군만 모시는 사당을 도비와 시비로 만들어져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조경사업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정부에 건의를 했으나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로는 당시 5.18문제도 있었지만 일가가 아니었고 강원도 연두순시에서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족들은 이미 전상의 장군의 유품이 인사동 골동품 시장에 나왔을 때 자기 일가가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동에 나왔던 유품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던 것 같습니다. 중앙 박물관 박병삼 관장이 모조품을 만들어서 전상의 장군의 유족보존회에 기증을 했습니다. 유물관에 가보면 기증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가는 완산 전씨이고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씨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는 전남 도민의 도비와 시비로 건립한 것이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자기네 조상을 빛내기 위해서 한 역사가 절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전상의 장군의 험한 질곡의 역사(김준의 후손들의 상소문. 포충사에서 좁아서 모시지 못한 일. 김준을 충민사에 모시려는 것에 대한 청와대 진정.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등)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겠으나 이만 말을 마치겠습니다.”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만 충민사 전상의 장군의 사당은 전남도민(당시는 광주는 전남도에 소속)의 혈세로 건립된 사당이며 전두환 전 대통령과 상관이 없슴을 밝힙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이어서 “훌륭한 조상을 잘 모시려면 후손들이 잘 되어야 하고, 후손들도 인심을 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정보로 역사를 왜곡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의 후광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로 인해서 더 이상 오해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주변국으로부터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곤욕과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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