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인의 파리문화기행 14-마레 지구의 새 숙소
정대인의 파리문화기행 14-마레 지구의 새 숙소
  • 정대인 전 미국 산타페예술대 교수
  • 승인 2014.12.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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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간의 20구 생활을 일단 접고, 다음 숙소가 있는 마레 지구의 작은 아파트로 향했다. 예쁘다고 구경만 하던 동네에 직접 살게 되니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집 주인에게 열쇠를 받기 위해서 아침 열 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1층인데, 파리에서 1층은 우리 기준으로는 2층이다. 좁고 낡은 나선형 계단으로 짐가방을 밀어올리다시피 해서 옮겼다. 암벽 등반이 이런 느낌일까. 무게 중심을 옮기려고 옆의 난간을 잡았다가 바로 놓았다.
왠지 저 낡은 난간이 못미더웠다. 혹시라도 무너지게 되면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씩씩거리며 짐을 다 올리고 나니 모르긴 해도 이 건물의 수백 년 역사 속에 몇 명은 낙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레 지구로 이사왔다는 기쁨도 잠시,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선 비린내인지 음식 쓰레기 냄새인지 알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집주인은 작은 집이지만 이런 저런 사항들을 설명해줬다. 대부분은 고장나서 작동되지 않는 것들에 관해서였다.
일단 문이 고장나서 자동으로 잠기지 않으니, 실내에서도 열쇠를 이용해서 잠궈야 했다. 부엌의 환풍기가 고장났다고 한다. 집주인이 출근해야 한다며 서둘러 나가고 나서 우리는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변기 뚜껑 한 쪽이 부서져 있었다. 세탁기의 건조 기능이 고장나 있었다. 쓰레기통이 너무 지저분했다. 냉장고에서 냄새가 났다. 전자렌지 안은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사실, 여행와서 비싼 호텔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다른 이가 살던 집에 들어와 사는데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던 20구의 아파트에 익숙해져서,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될 듯 했다. 그래도 마레 지구라는 최적의 장소가 모든 단점을 덮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내가 숙소를 알아보며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집주인들 중에는 ‘까탈스러운’ 미국인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는 프랑스인들이 몇몇 있었다. 한 사람은 나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멀쩡한 음식들을 버릴 수 없어서 냉장고에 넣어뒀더니, 어째서 냉장고를 깨끗이 비워놓지 않았느냐고 투덜댔다는 둥,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호텔 룸서비스 부르듯이 연락을 자꾸 했다는 둥, 내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적혀 있어서였는지 나에게 불평 혹은 경고를 늘어놓았다. 그 집 주인과는 그 이메일을 끝으로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짐을 일단 정리하고, 향초를 사왔다. 다행히 마레 지구에는 그런 가게들을 무척 찾기 쉬웠다. 사서 집에 돌아와 보니 부엌 찬장에 아마도 이전 투숙객이 남겨놓고 갔을 기다란 향을 몇 개 발견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친절하게도 쓰고 남은 향을 다음에 들어올 (불쌍한) 여행객을 위해서 놓고 간 것이었다. 우리만 유독 예민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가 되기는 하는데, 뭔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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