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비밀 밝혀온 법의학자, ‘시인’ 되다
죽음의 비밀 밝혀온 법의학자, ‘시인’ 되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4.11.20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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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김윤신 교수, 문병란 시인 통해 공부해

“세월을 담은 주름살처럼/늘어만 가는 주검들//죽은 자의 묵묵한 사연과/주검 앞에 칼을 쥐고 선 자의 내연(內緣)”(‘다시 부검실에서’ 1, 2연)

“부검실에 섰는 나의 삶은 반쪽이다/차가운 시체를 만지는 나는 비겁한 의사다./두드리고 꺾으며 만지고 바라만 볼 뿐/육신을 덥혀 주지 못하는 나는 무력한 자다./허나, 그 눈빛엔 죽음을 통해 삶을 어루만지는 열정만이 가득하다.”(‘부검실에서’ 2연)

평생 시체와 씨름하며 죽음의 비밀을 밝혀온 법의학자가 시집을 내며 시인으로서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첫 번째 시집 ‘3일간의 진실’(코리아기획 刊)을 펴낸 김윤신 조선대 교수(52·의학과)는 “나는 부검실에서/인생을 배웠다”라고 노래하는 ‘시인이 된 법의학자’이다.

이 시집에는 6부로 나뉘어 총 80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3일간의 진실’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부검한 황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정년퇴임에 바치는 헌시이다.

“그날, 죽은 자의 가슴을 열어/본 것을 보았다 말하였을 따름이나/불의한 권력의 심장이 꿰뚫렸습니다/ 정의를 열변(熱辯)함도 아니었으나/압제의 갑문이 무너졌습니다.(중략) 그저 본 것을 보았다 한 그 한마디에/천지는 요동치고/어두운 권력의 하수인은 끌어내져 옥에 갇히니/3일간의 진실 투쟁은 한 인간의 고뇌였습니다.(하략)”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해에 조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정부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황적준 교수에게 감명을 받았다. 병리학을 전공한 그는 법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황 교수를 찾아가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10년 6개월 동안 근무하며 그는 무수한 시체와 대면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사인을 밝히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때만 해도 법의학자가 20여 명에 불과했다.

매일 많게는 10여 건의 부검을 했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 문학동아리 ‘동맥’에서 활동했던 그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틈틈이 시를 썼다. 장성군 서삼면 대덕리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부분원에서 근무할 때 ‘서삼(西三)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액자에 넣어 벽에 붙여두었다.

“아침 햇살이 세상을 비추기도 전에/차가운 해부대 위에/벗은 몸으로 누우신 당신,/우리 날마다 그대 영혼을 만나/버림받은 당신의 감추인 사연을 듣고/모진 삶의 이면을 보지요.// 그대 속삭임 듣고자/우리 그대 만큼 낮아져야 하리니/그대 몸을 닦음으로/우리 마음이 닦이고/그대 피를 씻음으로/우리 욕심 맑아지기에/영혼이 떠나버린 그대 육신 위에/우리 땀을 쏟으러/날마다 낙엽 뒹구는 서삼 길을 밟습니다.”

시를 본 수사관이나 유족들이 그에게 마음을 열고, 신뢰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 국과수 근무하면서 힘들었을 때 썼던 작품이라서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간다고 한다.

김 교수는 10년 넘게 몸담았던 국과수 생활을 정리하고 2009년 모교에 부임했다. “서삼에서 서석으로/부검실에서 연구실로//귀향이라도 좋으리/귀농이라도 좋으리/십년 반을 밭 갈고/오년 반을 씨뿌렸네”(‘귀거래’)라고 노래하는 그는 “모교는 내 고향”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모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는 문병란 시인이 운영하는 서은문학회에 가입하여 2년 동안 열심히 시를 공부했다. 2013년에는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도 했고, 올해 드디어 시집을 냈다. 그는 왜 시를 쓰는 것일까?

“시를 쓰면 제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됩니다. 또한, 시는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잘 쓴 시는 큰 힘이 있지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오랜 소망을 이룬 그는 의학과 문학의 행복한 결합을 꿈꾸고 있다. 오는 2016년에 의예과 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개설될 예정인 ‘의료인문학’ 강좌의 책임교수를 맡아 이끌어갈 계획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개설된 ‘의료와 문화사회학’ 강좌를 청강하면서 환자나 일반인이 의사에게 요구하는 기대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따뜻한 의사, 병으로 인한 불편한 마음과 두려움, 아픔을 치유하는 의료의 가치와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문학작품 속에서 의학교육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찾아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내년에는 연구년을 맞아 외국대학에서 행동과학 분야를 공부할 계획이다. 범인의 심리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을 분석하는 과학수사의 일종인 행동과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여 법의학자로서 활동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죽음이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죽음의 진실을 밝혀 낼 누군가의 헌신이 중요한 데 그런 역할이 법의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의학자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같은 존재라고 믿습니다. 의학도들이 전공을 정할 때 시류를 쫓는 경우가 많지만 법의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입니다.”

첫 시집 서문에서 “육친을 기르듯 애끓는 마음으로 시를 품고 싶었건만 아직 다음어지지 않은 미숙한 구석이 적잖다. 시를 가다듬듯 삶을 다독이고, 시인의 마음으로 가녀린 것들을 보듬으리라”고 술회한 그는 “시집이 몇 권이나 팔릴지 모르지만 팔린 만큼 평생 저에게 울타리가 되어준 모교에 발전기금으로 내겠다”며 끝없는 모교 사랑을 펼쳐 보였다.

한편 김윤신 교수는 조선대 의과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하고 고려대에서 법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고려대학교 의사법학연구소 의료법학연구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부터 2009년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영국 글라스고 대학교 법의학과에서 방문 연수했으며 법의학과장, 서부분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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