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친일 아리랑⑨
얼씨구! 친일 아리랑⑨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4.09.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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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친일을 논하면서 이광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이광수를 말하면서 그의 친일의 논거인 ‘민족 개조론’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민족 개조론은 도산의 실력 양성을 주장한 점진론을 이론화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광수의 친일을 논할 때, 그것을 이광수 개인에 국한하여 논할 때에는 그의 개인사와 개성과 주변 환경을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의 고백에서 주장한 대로 ‘삼만 명이라는 우리 민족의 크림이라 할 지식계급과 현재 이상의 무서운 압제와 핍박을 당할 우리 민족의 모양 때문’이라는 변명을 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의 범주 속에 넣어서 검토할 때, 어정쩡한 자기 합리화로 폄하하기보다도 일본의 식민정책에 연동하거나 농락당할 수밖에 없는 합법적 민족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개량주의의 한 가닥 면모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물론 그의 투항적 개량주의가 개량주의자 모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삼일운동 후 춘원이 독립신문에 ‘국민개업·국민개거·국민개병’의 취지의 글을 쓰고 귀국할 때 그의 멘토였던 도산은 적극 반대하였으나, 귀국 길에 오른 춘원이었다.

당시 사이토 총독의 새로운 문화정치는 조선의 지주 부르조아지를 포섭하여 조선인 상층을 회유 포섭코저한 정책이었다. 총독부 경무국장은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제군은 민족의 행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나, 나는 한국인이 서로 융화 제휴하여 대아시아주의에 힘씀으로…제군이 하는 바도 우리 행동도 그 가는 방법을 달리할 뿐 종국의 목적은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독립이 불가능함을 설득하고 귀순을 권유하여 이광수, 김희선, 이영열 등 유력자를 귀순시켰다고 말하였다.

최남선은 총독부의 원조로 월간잡지 ‘동명’을 발간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다. 오늘날에는 한국 민족투쟁의 위대한 이정표인 3·1운동의 뼈저린 좌절과 파리강화회의·워싱턴회의의 한국독립의 무시와 대조적으로 일본의 강대국으로의 부상이 우리의 독립에 대한 무력감을 강화하였음은 불문가지였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힘이 없는데도 독립을 바라는 허망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고 실력을 쌓아 먼 장래에 독립을 기하는 문화운동을 벌이는 것이 보다 지혜로운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어느 관점에 있어서는 춘원의 멘토인 도산의 실력양성론과 맞닿아 있었다. 무장투쟁을 역설해왔던 단재까지도 1921년에 중국의 혁명가 리다자오에게 보내는 글에서 “무장단투란 유생의 능사가 아니란 것을 알아 전날의 그름을 자인한다”고 술회하여 독립전쟁 노선을 포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921년 여름까지만 해도 군사통일회의, 통일촉진회 등 군사통일기관을 결성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던 단재였다. 3·1운동은 단재에게 있어서는 운동을 넘는 민족전쟁이었던 것인데, 이제 싸움이 유생의 능사가 아님을 자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필자도 후인들의 가슴 저림을 감당할 수 없음을 토로하게 된다.

무력감 속에서도 결코 적에게 투항할 수 없었던 단재는 무정부주의에서 보다 넓고 높은 해방과 투쟁의 이정표를 찾아가는데, 춘원과 그 주변사람들은 갖가지로 옹색할망정 자기변명을 꾸려 일제에 투항했고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외양과 실질을 준비하여 조선인 엘리트들을 유인하였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엘리트들은 대체로 문화적이고 점진적이면서 민중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계급폭력에 두려움을 가졌는데, 춘원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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