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동포 이야기⑤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 최재형
고려인 동포 이야기⑤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 최재형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4.07.31 13: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 땅에 흩어져 사는 우리의 또다른 이산가족 디아스포라(Diaspora). <시민의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재완 시민기자는 고려인돕기운동본부와 한인 러시아 이주 150주년 맞이해 모국초청행사를 위해 지난 6월 14일 러시아로 동행해 22일 함께 들어왔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 시민기자는 이미 지난 2011년부터 연해주를 다니며, 고려인 동포들의 영정 사진,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을 해왔던 터라 고려인들과 알고 지내온 인연이 꽤나 있었다. 앞으로 고려인 이주사 뿐만 아니라 강제 이주에 얽힌 이야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의 이야기 등 함께 지내온 고려인 동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편집자주

   
 
최재형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했던 분의 이야기를 조금 더 언급 하겠다. 노비 아버지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로 이주한 뒤 하급선원, 무기공장 노동자 등 고생 끝에 군수산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이때 번 재산으로 물심양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 및 연해주 동포들과 독립운동, 특히 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를 격려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재정난으로 인해 폐간되었던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하여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비판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한일 강제 병탄 후에는 연해주에서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이던 중 체포되었다. 함께 항일 투쟁에 가담한 동지들은 최재형 선생을 구출하려 시도하였다. 일제는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선생을 총살형에 처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최재형 선생은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가족들은 1931년에 부친이 자본가였다는 죄목으로 울란-우떼 바이칼호수 근처 치따와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으로 유배가 된다. 고려인들은 러시아 사람들을 ‘마우자’라고 부른다.

최재형의 부인은 마우자들과 피를 섞기 싫어한 돌궐족 후손이었고, 우리와 생김새와 관습도 비슷한 키르기스스탄 사람들과 교류했다. 사범학교 화학과에 입학하여 이시쿨 호수 근처의 가락골에서 교직생활로 2004년 95세로 쓸쓸한 생을 마감했다.

스물두 살에 첫딸을 얻었는데 그녀 역시 키르기스스탄 국영농장인 콜호즈에서 가축 키우는 기술자로 일했다. 4째 딸은 쇼루코프씨를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한다. 그 시절에는 죄인 가족과 결혼을 하면 많은 불이익과 차별을 받았어도 최재형의 딸 이라는 하나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소련 시절에는 소련에서 죄인 취급을 받은 신분의 자손이었기에 떳떳하게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그러다 보니 유배를 당한 고려인들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러시아인들과 결혼을 하여 혼혈이 된 슬픈 사연이 담겨있다.

치따에는 ‘쇼루코프 거리’가 있는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다. 최재형의 후손들은 대부분 공학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고,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최재형의 아들인 재러 독립유공자협회 회장 최발렌찐도 공학박사다. 조카이며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쇼루코프 알렉산더도 전자제품 관련 회사에 근무 중이다.

그는 이번 방문에서 “대한민국에서 우리 외증조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독립유공자로 이렇게 대우를 해주게 되어 대단히 감사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어 한국 정부에서 우스리스크의 외조부의 옛집인 1919년부터 1920년 4월 처형 때까지 살았던 옛 집을 찾아주어 더욱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정신을 선양하기위해 국내외 고려인 동포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최재형 장학회'가 설립되어 활발하게 활동 하고 있다.

이번에 방문한 분 중에 한국명이 신금천이라는 분이 계신다. 그는 1938년 8월7일 생이다. 1937년 9월부터 강제 이주가 시작 되었을 때 그는 엄마의 뱃속에 잉태 되어 있었다. 이듬해 그는 우즈베키스탄 땅굴 맨바닥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끔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조부와 부모님의 고생담, 어렸을 때 봐왔던 그 시절의 가끔은 토해내며, 버겁던 토굴에서 태어나 어떻게 운 좋게 살았다고만 밝힌다. 당시 영유아 사망률은 40%가 넘었다고 한다, 둘 중 하나는 죽는다고 봐야 했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