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동포 이야기④ 한인들의 난로가 되어준 최재형
고려인 동포 이야기④ 한인들의 난로가 되어준 최재형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4.07.24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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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게바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가’ 재러시아 독립운동가
러시아 땅에 흩어져 사는 우리의 또다른 이산가족 디아스포라(Diaspora). <시민의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재완 시민기자는 고려인돕기운동본부와 한인 러시아 이주 150주년 맞이해 모국초청행사를 위해 지난 6월 14일 러시아로 동행해 22일 함께 들어왔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 시민기자는 이미 지난 2011년부터 연해주를 다니며, 고려인 동포들의 영정 사진,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을 해왔던 터라 고려인들과 알고 지내온 인연이 꽤나 있었다. 앞으로 고려인 이주사 뿐만 아니라 강제 이주에 얽힌 이야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의 이야기 등 함께 지내온 고려인 동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편집자주

   
▲최재형 초대 재무총장
일제강점기 시절 러시아 한인 동포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한국의 ‘체게바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가’는 재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1860~1920)을 일컫는 말이다.

함경도 태생의 최재형은 러시아로 이주해 재산을 크게 모은 뒤 언론·교육 사업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쳤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비롯한 항일무장운동을 배후 지원했으며, 말년에는 스스로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잡혀 총살당했다.

상업으로 재산을 모은 뒤 그것을 조국독립과 동포들의 삶을 위해 아낌없이 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황제를 알현할 만큼 러시아에서 입지가 탄탄했으면서도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한 혁명정신의 순수성은 그가 ‘한국의 체게바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1990년 한·러 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 재러시아 독립운동사에 묻혀 있었다. 그의 러시아 이름은 최 뽀또르 세메노비치이다.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慶源)군에서 노비 최형백과 기생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그 당시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는 참경이 벌어지자 최재형가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최재형이 9세 때 1869년 9월 9일 할아버지, 부모님, 형과 함께 연해주 포시에트지역 지신허로 도망하였다. 최재형가가 러시아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경원 지역이 두만강을 끼고 있는 북만주 또는 러시아 연해주로 나가는 출구인 혼춘(琿春)과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최재형은 러시아 최초의 한인학생으로 학교에 다니다가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11살 때 가출을 한다. 거지나 다름없이 길거리를 헤매던 최재형은 배를 타고 세계를 돌며 장사를 하는 러시아 선장의 눈에 띄어 17살이 될 때까지, 청소년기에 두 번에 걸쳐 지구의 반 바퀴나 도는 긴 항해는 원대한 꿈을 잉태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유럽 여러 곳의 앞선 문물을 접하고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러시아에서도 꼭 필요한 인재로 인정받는다. 6년의 항해를 마친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와 중국어 구사력으로 극동에 주둔하는 러시아 군대에서 통역사로 채용된다.

다시 시베리아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는 한인 책임자로 발탁되어, 도로공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러시아로부터 여러 번 훈장을 받는다.

이후 그는 1880년대 러시아에 귀화한 뒤, 그 지역의 도헌(都憲:, 군수) 및 자산가로 성장하여 재러 한인사회를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며,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가장 신망 받는 친 러시아 인사였다.

그리고 최재형은 자신의 부를 아낌없이 쾌척하여 한인들을 위한 학교 30여 곳을 짓고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앞장 선다. 또한 한인들의 가난을 면하기 위해 극동에 주둔하는 군대에 납품할 식재료를 공급할 수 있게 한인들에게 가축을 키우게 하고 우유와 고기 계란 등을 군부대에 납품하도록 격려한다.

▲최재형의 외손자 쇼르코프 일렉산더와 증손자 (Shorukov Alexander)
한인들은 최재형이 이끄는 대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때부터 최재형은 ‘한인들의 난로’라는 뜻으로 한인들에게 페치카라는 별칭을 얻는다. 그는 한인들이 낯선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인생의 목표를 가졌다.

최재형은 간도관찰사 이범윤을 만나면서 의병들을 돕게 되고, 그 후부터 최재형은 의병들의 의식주는 물론 무기까지 지원하면서 러일전쟁에 참여하여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다.

1905년 이후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참여하며, 안중근 의사를 만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수 있게 뒤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헤이그로 가기 위해 러시아에 온 이준과 이상설도 최재형의 집에서 머물다 떠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최재형을 재무총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최재형은 수락하지 않고 오직 한인들의 페치카로 만족하며 독립군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1920년에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에게 처형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볼셰비키혁명(1917년) 이후 연해주의 빨치산운동에 가담한 최재형이 1920년 ‘4월 참변’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4월 참변은 러시아혁명 진압을 목적으로 구성된 국제간섭군에 가담한 일본이 러시아 혁명세력과 결합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무자비한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다.

최재형은 1900년대에는 러시아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조직인 동의회(同義會)의 총재로서 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된 민족 언론인 대동공보(大東共報)와 대양보(大洋報)의 사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대 초반에는 권업회(勸業會) 총재,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의회(大韓國民議會) 명예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1900년대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지역에서 조직된 주요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상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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