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육지표와 국민교육헌장
우리의 교육지표와 국민교육헌장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06.1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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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1978년 6월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인이 국민교육헌장의 원천적 비민주성을 성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에 발포된 것으로 당시의 문교부장관의 연설에 의하면 ‘민족중흥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물량적인 경제발전’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중심적인 인간을 주조하기 위한 국민상을 필요로 하였고, 그것은 ‘자기의 생존이 국가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 설명하면서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고 위압적으로 국민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헌장은 인간을 국가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그 구현을 위한 제반 조치를 확장하여 나아갔다.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구현요강을 마련하고 이를 위한 장학방침을 작성하고 국민교육헌장 독본과 국민교육헌장 그림책을 발간해 ‘국민 전체가 읽고 또 읽어서 헌장의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의해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971년 국가안보와 국력배양을 우선한 특별조치법과 시월유신을 거치면서 그동안 교육이념에 불과했던 국민교육헌장이 국민의 행동지표로 승격하게 되었다. 박정희에 의해서 국민교육헌장의 이념이 유신체제의 정신과 그 기조를 같이 하는 것으로 되어, 헌장은 유신과업의 실천강령으로 되고 국력배양을 가속화할 국민정신의 유신지침 화된다. 헌장은 그야말로 유신의 여의봉이 되고 있었다.
헌장은 신성시되어 단체행사에서 낭독될 때는 낭독자는 연단에서 헌장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처들고 낭독하고 참석자 전원은 기립하여 부동자세로 경청해야 할 성물이 되었다. 민주공화국에서 이루어지는 진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희화성을 자각하는 국민들은 없었다. 노망난 국민들이라고 대갈일성하는 김근태같은 선각자도 없었다.

박정권의 단말마의 아우성인 긴급조치적 탈법이 9호까지 계속되는 가운데 학생운동은 깊은 휴면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민족과 민주의 생장력인 학생들마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그 원기를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엽전은 별 수 없다는 비관성이 나오려던 차에 교육지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유신체제와 국가권력은 모든 국민들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는 먼 옛날인 체, 유신만세 박정희만세를 외치는 세력이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문창극과 같은 정통 언론인들도 신나게 활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악취와 어둠 속에 빛나는 무리들은 있기 마련 아닌가!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교육의 실패를 민주주의에 뿌리를 박지 못한 데에서 온 것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로 규정하였다. 나아가 민주교육에 어긋나며 일제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고 곁들었다. 또한 파시즘의 국가주의 교육 사상의 냄새를 확인하였다. 교육지표가 지적한 것은 일견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헌장은 이미 성물이었고 유신의 여의봉이었다.

선언은 성물로 위장한 독배에 청수를 끼얹어 그 반민주의 진상을 폭로시키고 일제 추종의 유신의 본질을 들추어 냈지만 독재적 억압자에게 돌아보는 반성은 없는 법. 11인의 교수들은 대학에서 퇴출당하고 교수구속과 퇴출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학교에서 추방한 것이 당시 박정희와 유신정부의 민족중흥을 위한 발악이었다.
교육지표선언을 통해 수면에 잠복했던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은 그 생명력을 다시 들어냈고, 헌장과 유신의 총책인 박정희는 10.26으로 그가 원했던 민족의 제단이 아닌 민주제단의 희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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