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예술마을을 보다(9) 예술가 명성 따라 마을 생명력 달라져
파리에서 예술마을을 보다(9) 예술가 명성 따라 마을 생명력 달라져
  • 파리=정인서, 권준환 기자
  • 승인 2014.06.0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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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도 수많은 예술가 발굴 가능성 엿보여
전담조직 만들어 문화도시 걸맞게 브랜드화 추구
1회 신화를 꿈꾸는 예술마을 만들기
2회 지역공동체형 창조경제 일군다
3회 테마와 생기가 살아 숨 쉬는 곳
4회 예술마을로 블루오션 차별화
5회 역사적 배경으로 모티브 찾아
6회 파리 현장에서 예술마을 꿈꾼다
7회 썽 캬트르와 프리쉬라벨드메
8회 까샹 예술인촌과 발산예술마을
9회 명작의 고향과 광주의 예술가들
10회 리옹을 변화시킨 시테크레아씨옹
11회 중세시대의 요새 생 폴 드 방스
12회 광주만의 브랜드형 예술마을 가능한가?
13회: 지역공동체와 상생 마을 육성

문화수도를 꿈꾸는 광주, 그 신화를 일구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이 추진되고 있고, 동아시아문화도시, 미디어아트창의도시 등 굵직한 대형 사업이 진행 중이다. 문화수도는 이러한 대형사업도 필요하지만 시민 스스로가 문화창조자이며 문화향유자가 되어야 하고 예술가와 주민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마을신화를 탄생시켜야 한다. 이번 기획취재는 광주시가 추진하는 예술마을 사업과 때를 같이 하여 국내와 해외 사례에 대한 현장 취재를 통해 예술마을 조성사업의 정책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편집자 주

   
 
예술마을은 작가와 주민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그곳의 주민 모두가 예술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 마을의 예술가 가운데 널리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 탄생했거나 함께 거주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있다면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할 수 있겠다. 그래서 마을에 거주하는 예술가를 후원하거나 그들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친절하게 맞이한다면 좋은 일이다.

이번 프랑스 취재에서 우리가 명화로 보아왔던 근대 인상파 화가들의 고향이나 거주했던 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장 프랑수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 ~ 1875)를 비롯한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 등이 있었던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하루로는 시간이 부족해 이틀 동안 시간을 투자했다.

처음에는 설레었다. 과연 그들이 살았던 마을에서는 어떤 곳이며 명화 속에 나온 배경과 실제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들 마을은 어떤 분위기로 예술마을을 꾸려가고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고흐, 70여일 동안 살다 떠나간 '오베르'

우선 고흐의 마을로 향했다. 파리 북서쪽 34㎞ 떨어진 곳의 우아즈 강변에 위치한 인구 1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흔적이라기보다는 시가 전적으로 나서 전체를 고흐를 중심으로 명작의 고향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취재진이 차에서 내린 곳은 오베르 마을 시청사 건너편에 고흐가 묵었던 라부 하숙집이다. 당시 월세 3프랑을 주고 하숙집 3층 다락방에 묵었다. 올라가보진 못했지만 그림으로 본 다락방은 조그맣게 보였다. 가이드인 코린 정은 고흐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고흐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 되어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걸작으로는 수많은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가 있다. 고흐는 생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동생 테오만이 계속 격려해주었고 사후에는 부인의 주도하여 전시회를 계속 열면서 재평가되어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고흐가 이곳에 머문 시간은 불과 70여일이었다. 파리에서 동생 테오와 심하게 다툰 뒤 오베르로 간 때는 1890년 5월 21일이다. 고흐는 이곳에서 무려 77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9시까지 붓을 잡을 만큼 거의 광적이었다. 하루에 한 점 이상의 작품을 그렸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별이 반짝이는 밤’ 같은 작품도 이때 그렸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1890년 7월 28일 그린 ‘밀밭의 까마귀.’이다.

오베르 노트르담 성당 뒤편 오솔길로 올라서면 바로 그 밀밭이 펼쳐진다. 밀밭 오른 편에는 마을 공동묘지가 보였다. 까마귀가 있고 공동묘지가 보이자 자살충동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햇볕의 밀밭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 뒤 피를 흘린 채 하숙집으로 내려왔다가 이틀 뒤인 7월 30일 동생 테오의 품에 안겨 숨졌다.

고흐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고흐가 오베르에서 그린 작품은 마을 곳곳의 모습을 담았다. 그래서 그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면 작품사진을 곁들여 간단한 안내문이 있었다. 간간히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비슷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이처럼 작가와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 고흐는 불과 70여일 머물다 떠났지만 오베르는 고흐의 마을이 된 것이다.
모네, 수련연못의 매력에 빠진 ‘지베르니’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가 43세 때(1883년) 센 강 연안으로 이사를 와 만년을 보낸 마을이 파리에서 서쪽으로 70㎞ 떨어진 지베르니(Giverny)이다. 그는 이곳에 1883년에 이사를 왔지만 1890년 집을 장만하고,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심었다. 어느 날 문득 연못에 매료된 그는 팔레트를 집어 들고 ‘수련’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모네마을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침 일찍 파리에서 출발했지만 지베르니까지는 좁은 국도를 따라 가는 길이 많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북서부 노르망디 경계선에 이른 곳인데 거의 10시 무렵에 도착했다. 모네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그것은 모네가 일본 만화풍의 목판화 우끼오예를 수집하고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진 때문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모네의 작품 <Impression: Sunrise>으로부터 시작된다. 1874년 그의 개인전 ‘Impressionist exhibitions’에 걸린 이 그림을 보고, 비평가 르로이(Louis Leroy)가 “그림도 참 이상하다. 마치 인상을 빗대어 분위기만을 전달하는 그림과 같다”라고 한데서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비롯된다. 당시에 비평가들은 색감도 이상하고 붓터치는 말할 것도 없고, 원근법도 거의 없다며 악평을 했었다.

줄을 서서 들어가기에는 1시간여 이상 걸릴 것 같았다. 코린 정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한 끝에 재빨리 인터넷으로 모바일 표를 구매했다. 그리고 50여m 떨어진 곳에 단체관광객과 예매권을 가진 사람만 입장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는 모네가 살면서 작품을 그렸던 집과 화실이 있고 모네의 정원은 유명한 ‘수련 연못(The Waterlily Pond)을 탄생시킨 현장이기도 했다. 또 그림에 등장하는 일본식 다리와 장미 정원도 있고 수많은 꽃들이 사람들을 맞이했다. 다행히 5월초였던 터라 정원의 꽃이 가장 예쁘게 필 때였다.

정원을 먼저 둘러본 뒤 모네의 집(Maison et Jardins de Monet)으로 들어가는 데도 줄을 서야 했다. 2층 집 곳곳은 물론 복도까지 모네의 작품과 우끼오예가 걸려 있었다. 이곳은 기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2층 맨 끝방에서 바라본 정원은 그의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다.

모네의 집에서 1백여m쯤 떨어진 곳에 특이하게 미국미술관(Musee d’art Americain Giverny)이 있다. 지베르니는 1880년대에 모네와 교류하기 위해 미국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는데 테오도어 로빈슨(Theodore Robinson, 1852~1896)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밀레, ‘만종’을 탄생시킨 ‘바르비종’

이번에는 파리 남쪽 60km 지역에 있는 인구 1,200명 정도의 전원마을인 바르비종(Barbizon)으로 향했다. 1830년경부터 유명한 화가들이 대자연과 농민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머물면서 그들을 바르비종파라고 부른다. 장 프랑수와 밀레와 테오도르 루소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마을이 작고 도로가 좁기 때문에 취재진은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밀레의 작품 <만종>의 배경이 된 밀밭과 타일모자이크 작품이 있어 현장이라고 안내하는 듯 했다. 밀레가 이곳에서 <만종>, <이삭줍기> 등을 그렸다.

그리고 중심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그랑드(Grande) 거리를 따라 늘어선 바르비종파 화가의 관련 기념관과 카페 등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는 입구처럼 타일모자이크 로 된 밀레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있었다. 또 마을 뒤편의 언덕에는 큰 바위에 밀레와 루소의 초상을 동판으로 만들어 붙여놓아 이들이 이곳을 늘 산보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바르비종에는 박물관이 된 밀레아틀리에(www.atelier-millet.fr)와 당시 가난한 화가들을 지원했던 여인숙(Auberge du Pere Ganne)이 바르비종화파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갼(Ganne)박물관이 되었다.

밀레아틀리에는 3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방에는 70여명에 달하는 바르비종의 화가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화가들의 사진과 이름을 넣은 액자 3개가 입구에 걸려 있었다. 이 방은 밀레의 작품과 바르비종파 작가의 작품이 있었다.

▲밀레 아틀리에 매니저 FARHAT Bachar
그리고 두 번째 방은 옛날에 식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밀레’ 가족의 사진, 드로잉, ‘밀레’가 사용하던 팔레트, ‘테오도르 루소’의 팔레트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방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과 판화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대부분 1980년대 전후 작품으로 250만원부터 1억원대까지 값이 매겨진 10호에서 50호 정도의 작품들이 걸려 있었고 2호에서 4호 정도의 최근 작가들의 작품도 일부 있었다.

취재진은 밀레아틀리에를 빠져나와 인근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한쪽에 크고 작은 그림들이 있었다.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종업원의 작품이란다. 그는 프랑스령의 조그만 섬나라에 살고 있는 데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2003년부터 바르비종에 정착 중인 32세의 젊은 작가였다. 그림도 괜찮아 보이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 광주레지던시에 그를 불러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 예술가들과 주민간 공동체 이뤄내야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본 그림 속의 풍경들을 찾아 그들의 마을 찾아가는 일은 이곳에서 예술인들과 직접 호흡하며 살았던 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로부터 새로운 발상을 얻을 수 있을까였다. 우선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예술가의 흔적이 당장은 아닐지라도 예술가의 명성에 따라 마을의 명성도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최소한 50년에서 1백년 이상의 장기적인 기대이다.

그렇다면 광주에도 그렇게 명성 있는 예술가들이 있지 않은가.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에서처럼 동구 지산동의 오지호 초가와 지원동의 의재 허백련 화실과 주변의 의재문화센터 등을 개발하는 데 참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또 남구 양림동에 화가와 소설가 등 알려진 예술가들이 있고 정율성 생가도 있다. 광산구 소촌동에는 박용철 생가 주변에 문학마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도 천경자, 고은 등 광주를 거쳐 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공간을 발굴하여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전담조직을 만들고 그들의 공간에 작품이나 안내문을 부착하는 등 광주의 기본 관광코스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 지베르니, 바르비종=정인서 권준환 기자

*이 기사는 지역발전신문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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