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9)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9)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4.05.2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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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필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이 그 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분단의 현실이라고 지적했었다. 그런데 분단의 여파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 수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어 우리들을 안타깝게 한다.
당시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를 인솔한 이범석은 장군의 공로를 과대평가하면서 홍범도 장군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홍범도 부대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었다.
1971년에 출판된 이범석의 자서전 ‘우둥불’에서 역사 왜곡은 장황하게 서술되고 있었다. ‘우둥불’의 86쪽에 있는 “민족의 긍지인 역사적 사실을 흐릴 수 없다”는 단원에서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는 소수의 군대로 수십배의 강적과 싸워 수천명을 섬멸한 각국 전사상에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전투였다고 말하면서 그의 술회는 계속되고 있었다.
“8일 밤 작전회의를 열고 김좌진 장군을 총지휘로, 홍범도, 최명록 두 분을 부사령관으로, 여행단장이었던 내가 전적 총지휘, 즉 전투사령관으로 부서를 정했다. 또한 홍범도 부대가 터시고우방면, 의군부가 무산간도 방면의 버들고개, 군정서 군대는 중앙의 송림평을 각각 작전지역으로 정했다. 그런데 9일날 새벽에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모두들 떠나가 버렸고, 다만 한민단 일개 중대만 남아 있었다. 3개 단체는 아무 말 남기지도 않고 밤의 장막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5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를 상실한게 확실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군정서 부대는 송림평의 전투 예정지역에서 골 안쪽의 백운평의 소수병력에 유리한 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황당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그럼에도 청산리 전투의 큰 승리를 일군 김좌진 부대의 분전에 한없는 경의를 표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의 청산리 전투의 연구 결과는 이범석의 증언과 사뭇 다르다. 김삼웅, 정세윤, 박창욱, 김춘선등이 그들 학자다.
청산리 전쟁의 주역은 누구인가가 논란이 되었던 듯 싶다. 연변대 교수 박창욱은 “청산리 전투의 주역”에 관한 논문에서 김좌진과 홍범도의 역할을 추적 비교하면서, 김좌진 부대는 백운평전투 천수평 습격전을 수행했고, 홍범도 연합부대는 완루구전투, 대굼창전투, 천보산전투, 맹개골전투, 고동하 등 허다한 전투를 주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범석은 청산리 전쟁을 간추리면서 첫째는 홍범도 장군이 청산리 싸움에 참여하려다 그만두고 단독으로 행동하다가 타격을 받았고 지청천 장군과 청산리 싸움은 거리가 멀고 일본인이 사진으로 담은 무기는 홍범도 부대가 집단적으로 뺏긴 무기이며 그가 속한 군정서부대는 일인에게 잡히거나 무기를 뺏긴 일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의 전공 다툼이 지나치다가 보니 역사 사실을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아니면 초대 국무총리로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된 이범석이 혁혁한 전공으로 정치자본을 만드는 수단이었을까 하고 가늠해 본다.
김좌진은 이미 고인이었고 지청천은 남한에서 정치적 활동은 없었고 홍범도 장군은 철의 장막 저편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그의 귀국의 가망이 없는, 흔적만 들쳐내지 않으면 영영 잊혀질 쇠잔한 노장군일 뿐이었다.
항차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 공민권을 취득하고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한 행적을 아는데, 분단 한국의 국방장군을 지내고 한국전쟁을 치른 족청의 최고 지도자 철기 이범석으로서는 홍범도장군의 영예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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