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렬사 김천일 의병장을 찾아서
정렬사 김천일 의병장을 찾아서
  • 신문식 시민기자
  • 승인 2014.05.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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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목사골 나주는 위국충정의 산실

▲ 김천일 의병장의 초상화
1592년 임진년, 나라는 사색당파로 갈라져서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당론만 내세우고 싸우다가 결국 왜구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정국과 무엇이 다른가? 국회는 날마다 정쟁만 일삼고 깨똥에 분칠한 정치가들이 새정치를 한다면서 국민을 우롱하고 있으며, 남북대치상태에서 미.일.중.러는 호시탐탐 틈만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은 평양과 의주로 피신을 하고 백성들은 임금의 피신을 반대하고 돌을 던지며 욕설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주의 선비들은 임금님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뜻있는 선비들에게 통발을 했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일 먼저 주장한 분이 나주의 선비 문열공 김천일 의병장이다.

임진년 이전에도 왜놈들은 틈만 있으면 우리나라를 노략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주의 출신 고려의 정지장군은 왜구와 바다를 지켜야 하는 계책을 올렸다. 그래서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다고 한다.

지금의 선비학자들과 돈 많은 재벌가와 그 가족들은 대개가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라가 위급할 때 도피성 이중국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런 사람들이 선거철만 되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개똥에 분칠한 발언을 하니 아무리 위장을 하려고 해도 국민들은 그 개똥냄새에 고개를 돌린다. 현명한 유권자가 현명한 국민의 대변인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두더기 마음에 고까옷을 걸친 사이비 정치가들은 분명 알아야 한다.

의예의 고장 나주, 1000년 역사의 목사골 나주에서는 구국충정과 애국애민 하는 선비들이 많이 태어났다. 나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서 정국이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하신 의병장들의 유적을 찾고 행적을 더듬어 이 시대의 어려운 난국을 슬기롭게, 그리고 반복된 역사를 차단하고 창조적 미래를 역동적으로 펼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주의 정렬사로 달려갔다.

▲ 경의를 표하면서 들어서는 홍살문.
나주의 정렬사는 광주에서 승용차로 35분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나주동신대학교 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편의가 좋은 곳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산 교육장이었다.

「김천일 의병장이 태어난 때 1537(중종 32)이요, 죽은 때는 1593(선조 26)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라·충청·경기·경상 4도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가계와 관직생활로는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극념당(克念堂).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 받아 군기시주부가 되고, 그 뒤 용안현감과 강원도, 경상도의 도사를 지냈다.

사헌부지평의 자격으로 정치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실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 등을 두루 지냈다.

임진왜란 때의 활동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국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이어 호남에서 가장 이른 5월 6일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6월 3일 서울 수복을 목표로 북으로 향했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8월에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거점을 옮기고,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는 등 전투를 준비했다. 이 무렵 장례원판결사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았다.

그 뒤 조정과 호남·호서를 연결하는 전략상 요지인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화도 전투, 선유봉(仙遊峰) 및 사현(沙峴)전투, 행주산성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593년 명과 일본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해 6월 2차 진주싸움에서 관군·의병의 지휘관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등과 함께 항전했으나, 10만에 달하는 적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그러나 이때 일본군도 병력을 많이 잃어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로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경전(經典)을 몸소 실천하고 특히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썼다. 또한 인재의 육성이 치도(治道)의 근본이 되며,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수령을 잘 임명해야 한다는 등 당시 폐단을 개혁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이 더해졌다. 진주 창렬사(彰烈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건재유집〉이 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나주정렬사 홍보지에서 발췌>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는 모든 국민이 오직 구국일념에 햇불을 올려야 한다. 김천일 의병장과 같은 선비들과 백성들이 붓과 농기구를 내려놓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국란에 솔선수범 뛰어들었기 때문에 나라는 구해지고 호남의 정신은 길이길이 빛나는 것이다. 불신에 앞서 구국애민하는 나주의 김천일 의병장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면 한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이순신장군의 말씀이다.

▲ 유물관.
정렬사 주차장에 들어서자 홍살문은 높은 계단 위에 있었다. 합장을 하면서 한 계단 두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생각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그 시절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의병장은 왜 사지로 뛰어 들었을까? 지금의 장차관과 고위공직자들이 몇 사람이나 자진해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자진해서 전선에 갈까? 아마 비행기 표사기에 바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홍살문의 위엄에 정숙을 표하기 위해서 합장을 했다.

정렬사의 경내로 들어서니 말발굽 소리에 귀전을 울리는 것 같았다. 유물관도 찾아보았다. 그리고 정렬사 사당 문을 열고 합장 배례하고 나서 계단에 앉아서 전방을 쳐다보니 나주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의병장은 나주의 곡창, 호남의 곡창을 왜놈들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말갈기를 후려쳤으며 의병참여를 독려했을까? 만약에 호남의 곡창지대를 왜놈들에게 뺏겼다면 군량미를 확보한 왜놈들에게 많은 시련을 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정렬사 사당
나주의 진산 금성산은 신령스러운 영산으로 고려 충렬왕에게 적열공이란 벼슬을 받는 명산이다. 고려의 조정에서 제물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지낸 신령스런 산이다. 금성산에는 많은 일화가 있다.

나주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남의 중심도시였으며 이순신장군의 약무호남(若無湖南)이라는 말은 나주를 칭하는 말이다. 나주의 정신은 “정의롭고 예절바르며 남을 칭찬하고 인재를 육성하며 미래를 창조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나주경찰서 앞 대로에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의 흐름이 지금에 이르러 유유히 전하고 있다.

김천일 의병장에 관한 비문

세상은 변하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나주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나주는 천년역사를 간직한 조선팔도의 한 도시였으나 광주에게 호남의 중심도시를 내어주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나주의 보수적인 정서 때문이다. 서양문화를 먼저 받아들였다면 나주는 급속히 발전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주는 천연 역사의 보수적 성향이 강한 오직 나라를 위한 충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정의롭고 예절이 바른 천년 역사의 찬란한 목사골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며 서울과 같은 지형적 형국이라 해서 소경이라고 했던 도시이다.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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