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와 ‘2014년 5월의 광주’
‘1980년 5월의 광주’와 ‘2014년 5월의 광주’
  • 변원섭 객원기자
  • 승인 2014.05.1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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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 피살함으로써 계엄령 선포,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총격전 끝에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등장하였다.

1980년 들어서 전두환 신군부 독재에 항거하여, 전국 곳곳의 대학생들과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렀고, 80년 3월 29일 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61명의 학원사태 성명서 발표, 4월 3일 서울대생들이 농성에 돌입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광업소 700여명 광부들과 경찰간에 충돌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3월29일에 이어 4월 24일 다시 서울지역 14개 대학 361명 학원사태 성명 발표, 5월 4일 국민연합 계엄령 해제요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5월 14일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단 27명이 가두시위 결의하고, 15일 서울지역 30여개 대학 7만여명이 서울 도심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시위하였으며,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생 대표 95명이 전국대학생회장단 대표회의 중 연행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9시 40분 전남대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대학생들과 광주에 진주한 7공수부대 계엄군이 전남대 정문에서 충돌, 오전 10시 ‘계엄령 해제’ ‘휴교령 철폐’,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에 들어갔고 10시 15분 곤봉을 휘두른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시작한다.

5월 18일 10시 20분 ‘금남로로 가자’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오후 3시 40분 유동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작전 감행, 오후 7시 계엄사령부는 광주시 통행금지시간을 9시로 단축 발표하게 된다.

18일 영문도 모르는 채 계엄군들에 의해 구타를 당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 사망으로 최초 희생자가 발생하여 5월 18일 밤을 맞이하며, 5월 19일 새벽 3시 광주역에 11여단 계엄군 증파로 19일이 시작된다.

(중간생략)5월 27일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이 시작하고,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이 광주의 새벽을 깨운다.

27일 오전 4시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4시 10분 계엄군과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5시 10분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27일 오전 8시 시내 전화통화가 재개된 이후 5월의 역사는 2014년까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4년 5월

진도앞바다 세월호 침몰 33일째, 이날 현재 사망자 수는 286명, 실종자 수는 18명이다. 그들은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에 있지만 누구도 사연을 모른 채 일기 탓만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의 대한 대 국민사과담화를 발표하면서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설립하는 등 대한민국을 대변혁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행여부의 신뢰는 의문이다.

국민은 슬픔과 무능한 정권을 비판하는 촛불집회는 지속될 예정이며, 세월호 침몰 사건이 어떻게 번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정국이다.

34주년 5.18기념행사는 역대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 문제로, 5.18유가족은 물론 5.18기념재단, 야당지도자도, 민주주의 텃밭을 일구어온 이 지역 대표적 재야인사도 정치인도 참석하지 않았다.

사표가 수리예정인 정홍원 국무총리와 새누리당 이완구 비상대책위원장 등 여당정치인 일부만 참석하여 피해 당사자가 없는 관제 기념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봉사시간으로 대체해 주고, 합창단은 일당을 주고 동원 구성하는 등 5월 정신은 찢기고 갈리고 말았다.

6.4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광주광역시장 무소속 후보 우세라는 뉴스 속에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각자 격전지를 방문하여 자당 후보에게 지지를 부탁하면서 전국을 누빈다.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는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으면서 1박 2일 일정으로 광주시장 선거에 지역 민심달래기 겸 5.18.묘지를 방문하였다.

대통령선거 당시 후보 보호를 목적으로 사복경찰의 공식 보호를 받은 일은 허다하지만,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역대 야권지도자들이 광주를 방문하면서 경찰버스까지 동원하여 신변보호를 받으면서 광주를 찾는 지도자는 없었다.

민주 대 반민주시대를 벗어나, 21세기 생활정치시대에 들어서 대통령도 아닌, 야당 지도자가 광주를 방문하면서 동원된 경찰을 점심 식당 내까지 배치하고 민주주의 상징인 5.18민주 묘역에서 경찰전용버스들과 사복경찰에 둘러싸여 10분 만에 도망치듯 추모하는 게 2014년 5월의 모습이다.

80년 5월 광주 시민정신, 당시 민주주의를 외친 지도자 및 지식인들과 2014년 현재 이 지역 정치인들과 야당지도자들은 어떻게 다를까.

민주주의의 텃밭에서 광주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이 경찰을 동원하여 지방선거후보자를 결정하는 광주시당 공관위에 버젓이 참여한 것이 2014년 광주 5월의 모습이다. 이 지역 정치인들이 네 편, 내 편으로 양분되어 편 가르기에 앞 장선 지도자들의 행동은 34년전 정신을 무참히 밟아지고 말았다.

80년 5월 광주시민들은 우리가 함께하는 함성이었다면, 2014년 5월 함성은 무엇이라고 표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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