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8)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8)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05.15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살다보면 절망적 현실은 구조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재앙으로 얼굴을 보이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서 희망의 줄을 놓을 수가 없다. 생존이 없다면 희망의 가닥도 주체도 있을 수 없음을 모든 개인사의 경험에서 우리들은 익히 잘 안다.
그러면 나라의 경우는 어찌할 것인가? 1910년 이후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은 없어져서 국제법상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반만년의 역사가 맥맥하고 그 역사를 갖추고 이어온 사람들은 의연하고 온전한데 망국이라고 수수방관할 수 없는 것이 사람 된 자들의 마땅한 도리였을 것이다. 망국의 어둠을 깨고 생명의 기운을 되살려 광복의 전선에 용약 분투하는 것이 대한 건아들의 나갈 길이었다.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함이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사 낙엽같이 쓰러지리라”는 1920년대 홍범도 항일 연합군의 ‘독립군가’의 일절이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김좌진과 이범석을 익히 아는 사람들도 홍범도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산리 전투는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이룩한 승리였다.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여 차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백운평 전투에서 김좌진 부대가 첫 승리를 이루었고 완루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일군 400여명을 전멸시켰다.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과 고전하고 있는 김좌진부대를 도와 1400여명에 달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국치 이래 가장 빛나는 대첩이었다. 청산리대첩 이전에 그 예고편격인 홍범도의 봉오동전투가 있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4일에서 6월 7일까지 이어진 전투로 봉오동 골짜기에서 현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일개대대를 섬멸시켰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제고하고 있었다. 일군의 기밀문서는 독립군이 “일조에 그들이 흉위를 나타내기에 이르면 중국 군경같은 것은 도저히 이를 진정할 수 없으며 홀연히 간도지방은 그들에게 유린될 것임은 명료한 것이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이 입안된 것은 봉오동전투 패배에 연유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은 정식 군복을 착용하고 통일된 군대조직을 갖추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은 “봉오동의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뒤 험준한 사방고지에 독립군 각 부대를 매복 배치하여 일군추격대를 유인, 포위하여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워 놓았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중국신문 ‘상해신문보’는 일군전사 150, 부상자 수십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가 그간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애석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연유가 있다. 크게 보면 분단의 현실이고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었다는 현실이다.
홍범도평전을 쓴 김삼웅은 “일제가 가장 겁냈던 의병대장 국권상실기 3대 대첩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라고 홍범도장군을 기리면서 아직도 유해봉환의 논의조차 없는 망각의 독립군이 되고 독립군 사령관이 되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의 말대로 이는 역사와 국민의 도리가 아니며 역사 정신과 민족정기, 사회정의에 배치되는 현상임이 분명하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