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전남공립사범학교 어떤 ‘항일운동’ 했나
일제강점기, 전남공립사범학교 어떤 ‘항일운동’ 했나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4.05.15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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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항일교육 운동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
학산 윤윤기, 한국사 교육 통해 조선 독립 강조

오래전부터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광주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독립운동의 활동에 있어 남다른 두각을 드러낸 곳이다.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이 익히 알려진 주축세력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민족, 교육운동을 펼쳤던 전남공립사범학교(광주교육대학교 전신) 출신의 항일운동 패턴과 성격을 짚어보는 의미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광주교육대 역사문화교육연구소는 14일 교육대 교육매체관 오헌실에서 ‘전남 사범 출신의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학교별 항일운동사 정리 필요

이날 심포지엄은 학산 윤윤기 선생의 유가족, 교육대 출신 인사, 이정선 교육대 총장, 재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 사회로 진행됐다.

첫 번째 발표는 김홍길 전남대 연구원이 ‘전남사범 출신의 항일운동 패턴과 성격’을 주제로 사범학교를 재조명했다.

▲김홍길 전남대 연구원
그는 “그동안 광주학생운동 연구는 일부 의미 있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며 “특히 개별 학교차원의 참여과정에 대한 접근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학교별 항일운동사를 다룬 책자를 보기 어렵다”고 전남사범학교생의 학생운동 패턴을 규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당시는 신사참배 거부, 동맹휴교 등으로 폐교조치를 당하는 학교가 빈번했던 가운데 전남·광주지역은 신간회 출현, 지역청년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다.

지난 1923년 설립된 전남공립사범학교는 일제가 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을 억제하고 공립학교 중심의 식민교육체계 정립, 식민지 교원 양성정책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김 연구원은 사범학생들의 성향에 대해 “상대적으로 사범학교생들은 졸업만 하면 바로 사회적 신분상승, 명예와 존경을 얻는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며 “타 학교들과 달리 비교적 맹휴횟수가 많지 않아 학생들이 학교당국과의 반발이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학내분규는 미미했고, 이런 패턴에서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은 비교적 단련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범학교 학생들은 비밀리에 사회과학연구모임을 진행하면서 광주지역 청년운동, 학생운동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항일역량을 축적했다고 한다.

광주학생운동, 독서회 결성 등 지원과 협력

전남공립사범학교의 공식적인 집단행동은 1927년 2월 5일 밤이다. 기숙사에서 체육교사의 조선학생에 대한 구타행위가 일어나자 수십명이 집단 반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사배척운동을 전개했고, 이같은 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중요세력인 성진회 그룹과 연계해 조직을 확장시켰다고 한다.

김홍길 연구원은 “1928년 맹휴과정에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성진회 계열 학생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됐었다”며 “이와 달리 사범학교 학생들에 대한 감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고, 사범학교의 학생운동역량은 큰 손실 없이 지속될 수 있었으며, 맹휴 대신 연구회 조직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졸업 이후 교편에 섰던 이들은 전남공립사범학교 후배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1929년 독서회 결성에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학교독립운동사의 측면에서 볼 때 전남공립사범학교의 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이 남아있다”며 “사범학교학생들은 광주학생운동뿐만 아니라 1930년대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나아가 해방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류시현 광주교대 교수
두 번째 발표는 류시현 광주교대 교수가 ‘일제강점기 학산 윤윤기의 민족의식과 교육관’을 주제로 교육대출신 항일민족 교육가에 대해 재조명했다.

류 교수는 “개별적 존재인 한 인물을 시대와 관계망 속에서 조망할 경우 과거와 현재, 사실(史實)과 사실(事實), 개간과 공감 등의 균형감각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학산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발을 결행했던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 조선물산공진회 등 수많은 국내외 사건이 발생했었다”고 입을 열었다.

윤윤기, 교육자·지식인으로써 항일교육 실시

1900년 7월 9일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난 학산은 1924년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해 졸업이후 전남 장흥군 안양공립보통학교 등 전남 곳곳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당시 관·공립보통학교 교사는 조선총독부 관료제 산하에 소속되어 매월 안정된 월급을 받고, 연금에 해당하는 은급 수령 대장자로써 오늘날의 공무원에 해당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관료인 교사들은 ‘체제 순응적’이었지만 학산 윤윤기 선생은 달랐다.

류 교수는 “학산은 제자들에게 조선민족의 위대함을 통해 자긍심을 갖게 했고 나아가 조선 역사와 문화에 관한 교육을 통해 자주독립에 관한 가능성을 항상 주입시켰다”며 “한국사 교육을 통해 항일민족교육을 했으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해왔다”고 설명한다.

한편 일제는 문맹퇴치 명목하에 농촌진흥운동으로 간이학교를 설립했지만 사실 ‘농촌통제’에 목적이 있었다. 학산은 간이학교에서도 일제의 의도와 완전히 다르게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며 활동했다.

발표를 마무리 하며 류 교수는 “학산이 불안감 없이 강력하게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것은 국제정세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민족운동 활동 및 교류가 그러한 신념의 바탕이 됐다”며 “전시체제기 ‘교육자’로서 청년과 학생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대신 조선의 독립을 대비한 민족교육, 항일교육을 실시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학산 윤윤기 선생의 선택은 보통학교, 간이학교, 양정원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두 발표가 끝난후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광주대 교수)이 좌장으로 임선화 광주교대 강사, 한규무 광주대 교수가 종합토론에 참석했다.

학산 윤윤기의 새로운 자료 발굴 절실

먼저 임선화 선생은 “전남공립사범학교의 학생운동 연구는 개별 논문으로 된 연구성과를 볼 수 없었는데 이번 학술심포지움을 계기로 사범학교의 항일운동이 밝혀질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며 “특히 황상남의 사회운동 네트워크망은 한 독립운동가의 사회적 관계와 그가 관계했던 단체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김홍길 교수의 발표에 있어 이러한 동향이 1920년 사회운동이 무르익었다는 증거로 봐야하는지, 전남공립사범학교의 통일된 명칭 정리 등의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한규무 교수는 “학산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제한된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고충을 잘 알지만 오늘 발표에서는 일제강점기 교육상황을 설명하면서 학산에 대한 내용을 일부 삽입하는 정도에 그쳐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고 털어놨다.

또한 한 교수는 “학산에 대한 후속연구를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절실하다. 새로운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면 비슷한 발표가 계속될 것이다”며 “증언자 및 관계자 명단에 나오는 분들의 인터뷰 자료의 정리 및 활용이 시급하고, 연구자가 활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부분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심포지엄을 정리하며 류시현 교수는 “증언자들이 상이한 회고를 하기도 하고, 연도나 내용도 다르지만 연구자들은 공통된 기억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연구하는 것이 몫이라고 본다”고 근현대사 연구의 어려움을 어필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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