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6)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6)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4.05.08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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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가 김삼웅이 쓴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을 인용하면서 우리들에게 별로 익숙하지 않은 독립투쟁의 혁혁한 장군 홍범도를 소개한다. 평전의 저자는 서문을 장군에 대한 진혼사로 대신하면서 “생소한 독립운동가, 존재는 낮익지만 실체는 낮선 인물”로 되어있는 현실을 아파하면서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의 반민족적 장군상들과 반민주 정치군인 장군상들을 같은 장군으로 호칭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스스로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격파, 명성을 날린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되었으며 조선독립은 무장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의병투쟁과 독립투쟁을 일관한 장수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사령관이기도 하였다.

1907년 이후 평안도 지역 주민들이 지어 부른 민요는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헤야 에헤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헤야 에헤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로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 홍대장 홍장군의 승전소식은 그야말로 복음이었고 희망이었을 것이다.

홍범도 장군을 평하다 보니 평전의 작자는 비감이 무량하다. “후손이 출세하면 조상의 키를 키운다”는 속언이 전하는데 가당치 않은데도 현실성이 담긴 표현이다. “출세한 친일파나 독재자 후손들이 선대의 죄상을 숨기는 대신 화려한 기념관을 짓고 어용지식인들을 동원해 전기를 펴내거나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일이 잦다. 친일. 친독재의 대가로 치부해 자식들을 교육하고 그 자손들이 출세해 수많은 추종세력을 거느리면서 조상의 선양사업을 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너무 초라하다. 의병. 독립운동을 하거나 통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되면, 당연히 후손이 영락하고 그들의 존재는 역사책에 이름석자나, 그마저도 아니면 무명전사로 사라지고 만다.” 평전 저자의 분노와 비애가 가슴에 와 닿으면서, 새로 걱정되는 것은 세상이 이렇게 되어가다가는 친일파가 왜 나쁘냐 독재자가 뭘 잘못했느냐고 적반하장이 일상사가 되지나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모든 것을 성취의 결과로만 말하는 세상에서 친일의 역량과 독재의 역량은 생존투쟁의 역량으로, 선진된 삶의 자세였다고 말씀들을 읊을 때, 우리들은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쉰 레코드 소리만 반복할까 어처구니 없다.

항일무장투쟁의 독보적 존재였던 홍범도 장군은 19세기 후반에 평양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출산 7일후 죽고 그의 아버지는 홍장군이 9세 때 작고했다. 숙부집에서 어린 날을 보낸 그는 15세때 군문에 들어가 사격술을 배우고 서울 파견근무를 통해 짧으나마 세상물정을 익혔다.

부패상관과의 갈등으로 군문을 떠나 3년여의 제지공장 생활도 여의치 않아 22세 때 강원도 신계사에 들어가 ‘지담’이라는 스님의 상좌가 된다. 스님의 설법을 통해 이순신 서산대사 사명당 등의 항일전쟁을 알게 되었다.

이후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 조선의 위기가 목첩에 이르렀을 때 시해와 단발령의 배후가 일본이라는 사실이 명약관화해졌다. 분기탱천하여 용약 일어선 홍범도는 1895년 황해도의 단발령이라는 곳에서 그의 최초의 의거 동지 김수협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무장항일에 나서게 되는데, 무기는 적에게 탈취하는 것으로 그 출발에서 빨치산의 전범을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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