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5)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5)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4.04.2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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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망국의 현실에서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는 단초는 새로 구심점을 복원하는 일이고, 나철에게 있어서 그것은 국조 단군을 다시 빛내는(중광)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시국과 무관함을 애써 들어내려 하였으나 일제의 촉각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는 대종교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종교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단군을 중광하는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그 실천은 결국 일본과 싸우는 일이었다. 독립전쟁이 국내에서 불가능할 때 조국의 인접 지역에서라도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대종교는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는 북간도에 1910년 지사를 설치하고 1914년에는 간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두었다. 이어 동만주와 남만주 연해주 상해에도 교구를 두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대종교 계통의 탁월한 군사 지도자는 서일과 홍범도이다. 대종교의 독립전쟁은 대종교들의 자금으로 양성한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그 총재인 서일이 조직 지휘한 청산리 대첩이 있다.

서일은 함북 경월 출생으로 1912년에 만주로 가 왕청현에 명동학교를 세우고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대종교 2대 종사 김헌과 함께 나철의 양대 제자로 최남선이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역사에 밝아, ‘신단민사’, ‘진리도설’ 등 역사·철학에 대한 저술을 남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일 전력의 의병들을 모아 ‘중광단’을 조직하였고 1918년에는 김좌진 등을 영입하여 ‘북로군정서’를 개편하여 같은 대종교계열의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체코제 무기를 구입하여 500명의 독립군을 완전 무장시켰고 사관학교를 세워 298명의 사관을 배출하였다. 1920년까지 정규 독립군 1500명을 양성하였다. 서일의 무장 독립군이 성립됨에 일본은 중국 측에 압력을 가했고, 중국 측은 독립군에게 산중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하여, 백두산 동북으로 옮겼다. 그곳이 바로 청산리 전투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독립군들은 청산리의 백운평과 천수평 그리고 마록구에서 3000여명의 적군을 전멸시켰다. 이후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만소국경의 당벽진으로 이동하는 중에 홍범도 장군과 이청천 장군의 대한독립군단은 그 밖의 10여개의 독립군 단체를 북로군정서에 합류시켜, 대종교 교인이 주축이 된 독립군의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단합된 11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서일이 그 총재직을 맡았다.

그 병력은 3,500여명이었으나 비적떼 2만을 매수한 일본군의 야습에 패퇴하게 되었다. 건곤일척으로 통합되어 항일의 대진군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패퇴하게 된 독립군단의 좌절에 서일은 낙담하여, 종내 그의 스승 나철처럼 폐기순명하였다.

폐기순명은 스스로 호흡을 끊고 목숨을 국조 단군의 영전에 생명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망국에 많은 열사들이 자결하였는데, 대종교에서는 대표적 지도자인 나철, 서일, 김헌 신규식들이 폐기순명하였다. 순명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다른 길은 없었을까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절망 다음에 국조의 보우를 담보하는 희망의 디딤돌로 순명을 환상하지는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살신성인이라는 말로 가치 선택을 독려했던 선인들의 많은 일화들을 우리들은 들어왔다.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순교의 이야기는 지난 역사는 차치하고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다. 의로운 삶을 무엇과도 바꾸지 못하는 생명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생명을 종지시키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최대로 확장시키는 최종적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철없는 생각 속에 먼저 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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