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문화도시(7) 취안저우 6, 신라,고려시대 활발한 교역의 도시
동아시아문화도시(7) 취안저우 6, 신라,고려시대 활발한 교역의 도시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4.04.04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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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공동조사 통해 교류 흔적 발굴 필요
▲ 취안저우 신화백화점(新華都) 광장

취안저우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들은 정말 많다. 그동안 취안저우에 대해 5회에 걸쳐 썼던 내용들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감동들이 많다. 또한 필요한 자료들은 취안저우 명승지의 관련 누리집이나 이전에 여행했던 이들, 그리고 고대 역사서들이 많이 도움이 됐다.

취안저우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취안저우 진강(晋江) 유역에서는 신석기 문화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대략 3~4천년 전에도 인류가 거주했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주로 민월족(閩越族)이 석재도구를 사용했고 도작과 방직, 도자기 기술 등을 갖고 있었다.

취안저우의 진강 이름은 서진(西晉)의 고토를 그리워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현재 상주인구 8백만명이 넘는데 도시인구는 470만명이고 한족이 전체의 98%를 차지한다. 특히 취안저우는 화교와 타이완 한족들의 선조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라 전 세계에 취안저우 호적을 가진 화교가 750만명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세관 설치할 만큼 교역 활발해

취안저우가 주목받게 된 것은 그동안 이야기했던 것처럼 해상실크로드가 번성하게 된 이후이다. 대략 8세기 중반, 아시아 대륙에서 카롤링거 왕조, 아바스왕조, 위구르왕조가 등장하게 된다. 특히 아바스왕조의 이슬람 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해상무역에 적극 뛰어들었다. 중동과 아시아 국가의 해상교류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했다.

특히 송나라 때는 아랍 상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북송 태조 원년(968)에서 남송 효종 건도 4년(1168)까지 칼리프의 명의로 파견된 공식사절단이 49차에 이를 정도였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취안저우에 있는 이슬람교도의 공동묘지이다.

북송 초기에 무역세의 징수, 무역품 판매허가증의 교부, 선박의 입출을 관장하는 기구인 시박사(市舶司)를 취안저우에 설치하게 되는 데 그만큼 취안저우의 위상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알게 해준다. 이곳 시박사를 통한 수입은 한때 국고 수입 전체의 60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번성했다.

취안저우는 크게 나누면 어느 도시나 그러하듯이 구도시와 신도시로 구분된다. 구도시에에는 대량의 민남, 이슬람, 유라시아 방식의 고건축이 남아 있다. 특히 붉은 색 벽돌로 건축된 이 거물들은 아름다우면서 고대 예술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 대만인들의 전통주택가옥을 전승하고 있는 붉은 벽돌집 채자심민거
대만 전통가옥 전형적 붉은 벽돌집

그래서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붉은 담에 붉은 기와를 가진 남안시(南安市) 관교진(官桥镇) 장리촌(漳里村)의 채자심고민거(蔡資深古民居)이다. 여기는 1709년에 완공된 세계문화유산인 영안토루(永安土樓)와 더불어 푸젠성의 2대 민족 건축물이다. 취안저우 시내에서 20㎞ 떨어진 곳에 있는 데 완벽하게 보존된 주택은 모두 16개이다.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축물은 청나라 동치(同治) 때 필리핀 화교 채계창(蔡啓昌)이 1865년에 장리촌에 와서 채씨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해 후에 그의 자손들이 계속 건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동서 200여m, 남북 100여m, 면적 16,000㎡에 이른다.

당시의 건축물은 독특한 조각예술과 장식 방법으로 지어졌다. 중국풍과 외국풍이 조화된 양식이다. 붉은 흙으로 만든 벽돌과 기와로 지었기 때문에 호화한 궁중건물을 방불케 한다. 붉은 벽돌에 청석을 깐 바닥, 조각이 새겨진 기둥이 어울려 소박하고 아름답다.

많은 건축물의 벽과 복도에는 인물이야기, 봉황그림 등 조각이 있고 명서 법가의 글이 새겨져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며 명승지가 되었다. 고대 주거 형태의 웅장한 구조는 대만의 전통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과 유사하다.

▲ 세계무역호텔해사광장에 있는 해상실크로드의 상징인 무역선 모형, 古港雄風'이란 명패가 있다.
우리 민족이 지배했다는 숭무고성

또 숭무고성(崇武古城)이 있다. 이곳은 꽤 멀다. 개원사나 낙양교 등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이다. 명나라 때 만들어져 6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흰 화강암으로 쌓은 성이다. 돌 성의 총길이는 2,457m, 남북 500여m, 동서 300여m, 높이 7m에 달하며 4면에 성문이 있는데 성문마다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성안의 연화산(蓮花山)에는 망대(望台)가 있고 열 십(十)으로 된 거리와 성곽과 문루, 월성(月城) 등 건물로 된 숭무는 공격과 후퇴가 가능한 고대의 전략적 방위공사물이다.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가는 해안가에 축성된 이 숭무고성은 백제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산에 글을 새기지 않은 돌이 없음’으로 인해 유명한 구일산(九日山)엔 원나라 이후 석각 70여개가 있고, 송나라 다리건축의 특징을 보유한 푸젠성(福建省)에서 보기 힘든 지붕이 있는 다리인 동관교(東關橋)가 있다. 또 “天下無橋長此橋(천하에 평안교보다 긴 다리가 없다)”는 평안교(平安橋)는 1138년에 건설하여 1152년에 완공되었는데 총길이가 오리(五里)이기 때문에 ‘오리교(五里橋)’라고도 부르는 중국에서 제일 긴 돌다리이다.

그리고 남쪽의 유람지인 보강석사유람선(普江石獅游覽線)에는 슬픈 이야기를 간직한 고수탑(姑嫂塔)이 있고, 우롱차(烏龍茶)의 산지이며 철관음(鐵觀音), 황단(黃旦)의 고향으로서 찻잎 재배에 있어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안계다원(安溪茶園), 경치가 수려하고 볼거리가 많은데 유교, 도교, 불교의 건축형식이 있는 36암동, 18풍경이 있는 청원산(淸源山) 등도 빼놓을 수 없다.

▲ 고려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취안저우 중산로 중심상가와 골목지역
중심상가 지역에 고려 거리 남아

한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지난해 5월 한국 실크로드 문화관 건립 타당성 조사를 위해 취안저우를 현장 조사한 적이 있다. 이들이 보고한 자료를 보면 취안저우에 신라 및 고려 관련 명칭이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예를 들면 취안저우 남안현에 신라촌, 신라사터, 신라소학 등이 있는데 신라촌에는 현재 약 2천명의 장락 왕씨 일족들만이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신라촌 장락 왕씨는 민국(閩國)을 세운 왕씨 일족들이 장락에 들어와서 장락 왕씨를 이루었는데, 그 후손 중에는 고려로 망명한 인물이 있었고, 망명자의 자손이 다시 송으로 들어와 벼슬을 하며 장락 왕씨로 복귀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의 성은 장락 왕씨로 고려 충선왕과 만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사라는 절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절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적보존에 대한 조치가 전무하여, 신라촌에 집을 지을 때나 마을길을 닦을 때 그나마 남아있는 돌을 사용하거나 훼손, 또는 버리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 신라소학은 몇 년 전까지는 초등학교로 사용되었으나, 문명교류연구소에서 2010년 2월 현지 답사한 결과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 한때 고려항(거리)라 불렀던 곳은 지금은 규하항(거리)이라 부른다.
신라촌은 시간이 부족해 들리지 못하고 고려항(高麗巷)을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 찾아갔으나 기사도 위치를 잘 알지 못했다. 자료사진을 보여주고 구글지도를 보여주었지만 결국 비슷한 위치에 내렸다. 지금은 규하항(奎霞巷)이라 부르지만 이때의 항(巷)은 항구가 아니라 거리라는 뜻이다.

취안저우의 중심지인 중산로에 인접한 거리에 고려항을 찾는 데는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다. 고려촌(고려마을), 고려길(까오리지에)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또 고려채(까오리차이)라는 보쌈 모양의 야채요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지만, 정확한 내력이 파악되지 않고 있어 한국 학계와의 공동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고려사에 따르면 송나라 때 고려로 간 상인 중에 취안저우 출신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쇄락하여 일부가 취안저우시의 역사․문화 보호구역으로 남아 있으나, 중국에서 ‘중산로’란 상가가 밀집해 있는 가장 번화한 거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과거 번성지역으로 생각된다.

즉 취안저우처럼 오래된 도시에서 중산로란, 매우 오래전부터 그 곳에 시장이 서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이곳에 고려항이란 거리명이 아직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 취안저우에서 고려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단서라고 하겠다.

▲ 취안저우도 신도심과 구도심으로 나뉜 가운데 곳곳에서 높은 빌딩을 올라가는 공사장 크레인이 새벽빛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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