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1)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아(1)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4.03.2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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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암 나철과 대종교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저수지에서 물을 빼는 때에는 고기들이 입질을 잘 하지 않는다. 물이 빠지는 것은 고기들의 활동공간이 줄어들어, 공간 위기를 느껴 식욕을 잃는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공간위기 의식의 예민함이 미물에 비길 수 없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우리들은 오늘도 암송하는가 싶다.
근래에 천부경 한단고기 등 상고사 자료들이 새롭게 관심을 끌면서, 그동안 거의 잊혀져 왔을 뿐만 아니라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에 의해서 그 흉상이 훼손까지 되었던 단군과 대종교에 대한 관심이 해외에서 나마 작은 불씨가 되어 살아나고 있다. 대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 교조인 홍암 나철을 떠 올리게 된다.

2004년 미국 L,A에서 열린 통일맞이 포럼내용을 김성일 한사상 연구소 소장이 정리한 것을 소개한다. 그는 말머리에 역사가 객관적 실증만으로 성립될 수 없음을 기독교와 몰몬교의 역사를 실례로 거론하면서, 기독교의 창세기에 비슷한 대종교의 신사기(神社記)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종교적 관점보다는 동아시아의 전환기에서 조선의 존재위기에서 비롯된 나철과 대종교의 발생을 살피려 한다. 서세동점이라는 서양세력의 동양침략에 편승하여 서양 제국주의를 더욱 포악하게 학습한 일본은 선린 우호라는 명목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제반 폐정과 부패로 찌든 조선을 침략하였다.

당시 조선은 왕조사적 순환의 필연으로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동학혁명으로 인민주권이 태동 발흥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침략세력은 조선정부의 숨통을 틀어막고 인간존중을 내건 동학혁명의 생기를 동강내면서 조선을 '보호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미물도 공간위기를 느껴 식욕을 잃는다는데, 조선 백성들의 분개와 비분은 어떠 했을까? 나라의 원기라고 자부했던 선비들의 절망감을 어떠했을까? 그들의 망연자실이 눈에 선하다. 의병으로 순국으로 대응했지만 망국의 쓰나미는 막을 수 없었다.

동학과 의병마저 실패하고 망국이 명약관화한 현실에서 일상적 각오로 현실에 대처하기에는 망국의 쓰나미는 그 끝간데를 헤아릴 수 없었다. 우승열패의 진화론적 결론은 부적자 필멸이 자명하여 망국을 넘어 망종을 전전긍긍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의 언론들과 개화지사들은 기왕의 정신적 지주인 유교와 불교를 타락한 종교로 치부하고 기독교와 같은 외래종교에서 새로운 원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망국은 기성사실로 굳어가고 인종의 절멸을 노심초사, 교회와 기독교적 규범에 따라 일체 단합하기만 하면 망종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나철은 전라도 벌교 출신의 선비로 29세에 장원급제하였고 같은 해에 승정원 기거주가 되어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 젊은 사관이 되었다. 1895년에 세무서장이라 할 수 있는 징세관으로 발령되자 관직을 청산하였는데 그간 김윤식같은 명사와도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는 1863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의 태몽에서 단군과 신모가 현몽하였다. 태몽을 소개하면 “ 거룩한 신모님이 금관에 옥대를 딘 천동(단군)을 안고 재석산으로 내려 오셨다. 수많은 선녀의 호위를 받으며 무지개를 나는듯이 걸어서.....”

예사롭지 않은 태몽을 꾸고 태어난 나철은 신동으로 자랐다. 어려서부터 우애심이 깊고 살생을 가리는 마음이 깊었다. 태몽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중국의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의 꿈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홍수전 또한 종교 창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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