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상상과 실제 ② '간첩 사건' 무죄 판결 받은 재일교포 이종수 씨
간첩, 상상과 실제 ② '간첩 사건' 무죄 판결 받은 재일교포 이종수 씨
  • 프레시안=서어리, 박세열 기자
  • 승인 2014.03.12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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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걸려 벗은 간첩 누명, 유우성은 운 좋다"

간첩. 대한민국 분단 현실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 중 하나다. 간첩이라는 말은 세 겹의 공포를 딛고 서 있다. 간첩에 의해 삶이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 내가 간첩이 될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내가 옹호하는 사람이 간첩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한다. 서울시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을 계기로 <프레시안>은 한국 사회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자 실제인 '간첩'의 사상누각을 짚어보고자 한다.

지난 편(☞관련 기사 보기 : "대한민국에서 간첩은 어떻게 조작돼 왔나")에 이어, 이번 편에서는 1980년대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5년 8개월간 복역한 후 26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교포 이종수 씨의 얘기를 전한다. 간첩 딱지를 떼고도 여전히 마음의 상흔을 지우지 못한다는 이 씨,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7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에서 진행됐다. (편집자)

1981년, 청년은 현해탄을 건넜다. 고국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남의 땅'에서 자라 정체성 혼란을 겪었던 그는 동포 아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민족학교의 한국어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여느 대학생과 같았다.

그러나 평범했던 그의 일상은 어느 날 집 앞에 나타난 사내들의 등장과 함께 깨졌다.

"학생들 데모가 아주 심할 때였어요. 제 대학 친구가 데모하느라 얻어맞고 다녀서 제 하숙집에 숨겨주곤 했죠. 어느 날 집 앞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찾아왔어요. '친구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 두 시간만 협조해달라'고 했어요."

별 의심 없이 따라간 곳은 '고문실'로 악명 높은 국군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이었다.

"차로 이동할 때 그 남자들이 제 머리를 눌러서 숨기더라고요. 창밖으로 제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거였어요.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그때야 알았어요."

 

▲ 1983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5년 8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26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교포 이종수 씨. 이 씨 귀에 걸린 투명한 튜브는 보청기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청력에 이상이 생겼다. ⓒ프레시안(최형락)

"허위 자백 뒤집자마자 검사가 자리 박차고 나갔다"

데모로 붙잡힌 친구에 대해 물어본다던 그들은 친구가 아닌 이 씨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북한에 다녀왔느냐", "북한에 다녀온 사람과 친하게 지냈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그는 "아니다", "없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그는 먼 친척인 '조신부' 이름을 댔다. 잘못한 게 없으니 사실대로 얘기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대답이 조작극의 단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 뒤 수사관들은 조 씨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사장이 있는 '나카야마(中山)' 회사에 다닌다며 "조신부가 너를 대남공작원으로 포섭한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조 씨가 다니는 회사명은 '나카야마'가 아닌 '다카야마(高山)'였다.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갖은 고문이었다.

고문받은 기억을 떠올리자면 한숨부터 나온다. 뺨 맞기, 물 고문, 전기 고문, 다리 사이에 몽둥이 끼우고 밟기, 통닭구이. 영화 <변호인>에 나온 그대로다. 수사관들이 얼굴에 주전자로 물을 붓고 "북한 갔다 왔지"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물 붓기를 4~5차례 반복한다. 그러다 기절하면 수사관들이 허위 진술서에 지장을 찍는다. 정신이 들면 수사관이 읊는 대로 자신이 북한에 갔다 왔다는 '소설'을 달달 외웠다. 영장 한 번 본 적 없이 그렇게 39일간 불법 구금됐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검찰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사관은 수시로 "조사 서류를 사형(死刑)으로 바꿀 것"이라며 협박했고, 검사는 수사관의 협박을 묵인·방조했다.

"검사실에서 저와 검사가 마주 보고, 옆에는 보안사 직원이 앉아요. 제가 마지막에 용기를 내서 '여태껏 한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했더니, 옆에 앉아 있던 보안사 직원이 저를 바로 보안사로 데려갔어요. '죽을래', '귀찮게 하지 말라'면서요. 그리고 제가 '아니'라고 말을 하자마자 검사는 그냥 나가버렸고요."

이때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검사는 영화 <변호인>에 소개된 '부림 사건'의 담당 검사, 최병국 전 새누리당 의원이다.

"정보기관 불리한 증거 나오자, 영사증명서 '날조'"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그에게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형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조신부의 반국가단체 구성원 여부가 확실치 않다"며 파기환송했다. 이 씨의 자백 외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곧 이어진 파기환송심에서 검찰은 새 증거 문서를 제출했다. 바로 영사증명서다.

"보안사 쪽에서 먼저 발급을 요청한 건데, 처음엔 '반국가단체나 조총련계와 관계가 돼 있다든지 증거는 찾아낼 수 없다'는 식으로 답변이 왔어요. 그런데 정작 파기환송심에 제출된 영사증명서에선 그런 내용이 다 빠졌어요. 대신 조신부가 조총련계 회사에 근무했고, 북괴를 찬양하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는 식으로 써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내용을 누구에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선 일체 언급이 없어요. 완전 거짓말을 지어낸 거죠."

이 씨에게 유리한 증거는 누락되고, 그 증거가 오히려 조작됐다. 그러나 영사증명서는 법정에서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서 효력을 인정받았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과 판박이인 셈이다.

"일본 오사카에 총영사관이 있는데 영사가 한 명이고, 부영사는 과거엔 20명 정도 있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까 의심스러운데, 아마 그중 대부분은 기관에서 나온 사람일 겁니다."

재판장에 나온 증인들도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다.

"저에 대해 안다면서, 제가 간첩이라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 사람들을 재판할 때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저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있나요? 나중에 들으니 조총련계에서 전향해서 한국 기관에 협조자가 된 사람들이라더군요."

▲ 보안사가 이종수 씨의 친척 '조신부'에 대해 오사카 영사관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 영사증명서. 실제 조신부의 직장은 조총련계 인물이 경영하는 나카야마(中山)가 아닌 다카야마(高山)였음에도 이 서류에는 버젓이 ‘나카야마 관광 주식회사에 근무한 바 있다’고 기록돼있다. ⓒ이종수

"'간첩' 얘기에 선 자리도 틀어졌다"

결국 이 씨는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5년 8개월간 복역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대형 국가 이벤트 덕분에 특별 가석방 자격을 얻었다. 자유의 몸이 됐지만, '간첩'이라는 낙인은 때때로 그의 앞길을 막았다.

"결혼할 때도 취업할 때도 이력서가 필요한데, 꼭 6년이라는 세월이 빠져요. 그걸 설명하기가 난처해요. 끝까지 숨길 수도 있지만 저는 솔직히 다 말했어요. 어쨌든 내가 겪은 일이니까요. 물론 불이익이 따를 수밖에 없죠. 한 번은 선을 본 적이 있어요. 나도 상대도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간첩 전력 때문에 얘기가 싹 없어졌죠."

몸도 망가졌다. 그는 보청기 없이 인터뷰와 같은 긴 대화를 하기 힘들다. 모진 고문이 남긴 후유증 탓이다. 그러나 청력에 생긴 문제가 고문 때문이라는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수사관들이 절대 세게 때리지 않아요. 조금씩, 티 안 날 정도로만 해요. 쇠망치로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쳐요. 그러면 시신경이 끊어진대요. 그렇게 해서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고문 후유증이라는 걸 증명할 수가 없어요. 매달 진단서를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는 군화로 하도 맞아서 허리가 아팠어요. 그런데 계속 징역을 살아야 해서 그대로 놔뒀더니 부러진 채로 뼈가 굳었더라고요. 그걸 일본에서 정밀검사를 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때 사진을 찍어뒀는데, 너무 오래돼서 이젠 없으니 증명할 길이 없어요."

"교포들이 고국 얘기에 치를 떨어…"

공포. 고국 대한민국에 대해 이 씨가 갖는 감정은 그리움이 아닌 두려움, 공포다. 이 씨처럼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한 재일교포들은 한국 얘기만 해도 치를 떤다. 공포는 그들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고자 하는 의지마저 꺾었다. 이 씨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한다는 소식을 일본에서 우연히 전해 듣고, 교포들에게 같이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몇 명이 같이 가기로 해서 비행기 표까지 다 끊어놨는데, 한국 가기 바로 전날 전화가 왔어요. 자기는 겁이 나서 못 하겠다면서 포기하겠다고요.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먹히더라고요. 다시 한국 땅을 밟는다는 게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돼버린 거죠."

그때 비행기를 탄 사람은 이 씨를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학교 선생님인 이 씨는 방학마다 한국을 찾았다. 진실화해위에서 매일 12시간씩 조사를 받았다. '꼭 무죄를 받아내리라'하고 어렵사리 걸음을 내딛었지만, 사실 무죄 판결을 받으리라곤 크게 기대치 않았다. 그러나 송씨 일가 간첩 사건, 제주 강희철 사건 등 굵직한 국내 간첩 사건이 모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면서 서서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0년 7월 15일, 이 씨는 무려 26년 만에 법정에서 '무죄'를 인정받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재일교포 가운데 처음이었다. 감격의 순간, 주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판사 입에서 '무죄'라는 말이 나온 순간은 안심이 됐어요. 하지만 동시에 착잡한 생각도 들었어요. 나는 이렇게 무죄를 받았는데,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재일교포들을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 고민이 됐습니다."

 

▲ ⓒ프레시안(최형락)

"간첩 조작,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재일교포 중 간첩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100명이 훌쩍 넘는다. 그중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이들은 이 씨를 포함 10명 남짓이다. 현재 30건 넘는 사건이 재판 진행 중이다. 이 씨는 이제 이웃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열심이다. 이번에도 다른 재일교포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 와서 그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접했다.

"TV에서 유우성 씨 사건 보도를 봤는데 '아, 아직도 그러는구나' 싶더라고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제가 당사자였으니까요."

'이종수 사건'과 '유우성 사건'은 거의 30년의 격차를 두고 일어난 일이다. 그렇지만 허위 자백 받아내기, 영사증명서 조작 등 정보기관의 '간첩 기획극'의 패턴은 똑같았다.

"자동차도 보면 겉모양은 조금 세련되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내부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간첩 사건도 똑같아요. 보기에만 조금 세련돼졌을 뿐이에요. 골격이나 시스템은 30년 전이나 똑같아요. 보안사에서 안기부(국정원)로 바뀌었고, 이번엔 영사증명서에 중국 도장 하나가 더 추가됐을 뿐이죠."

그는 그러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 '조작'이라는 사실이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는 데 대해 놀라워했다.

"21세기에 간첩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전 그러려니 해요. 하지만 사건의 전말이, 그것도 재판 중에 드러났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죠. 예전엔 다 묻혀버렸으니까요. 30년 만에 밝혀진 것들이, 지금은 3개월 만에 드러나고 있어요. 언론의 역할이 컸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유우성 씨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택에 한국 사회가 조금이나마 민주적으로 돼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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