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딸'과 '재벌가 아들'의 권력 다툼
'독재자의 딸'과 '재벌가 아들'의 권력 다툼
  • 프레시안=임경구 기자
  • 승인 2014.03.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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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몽준, 악연인가 밀월인가?
▲ 정몽준 의원@프레시안

마음 같아서는 전매특허인 '붕대 투혼'이라도 다시 불사르고 싶을 것이다. "선거는 당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선을 그어도, 전국단위 선거 패배가 야기할 집권 2년차의 재난적 상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없는 선거'는 헛말이다. 누가 뭐래도 6.4 지방선거의 중심엔 박 대통령이 우뚝 솟아있다. '박근혜를 위한 선거'가 아니고서는 날고 긴다는 여권 실력자들의 진퇴가 장기판 말처럼 일사불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학재 의원이 9일 인천시장 출마를 포기했다. 박 대통령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는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 장관을 지원하기 위해서란다. 유 전 장관과 이 의원은 박 대통령의 당 대표 시절과 대선후보 시절에 번갈아 비서실장을 맡았다. 나란히 출마하면 충돌이 불가피했다. 수년간 인천시장을 준비해왔으나 '박심(朴心)'을 쥐지 못한 이 의원이 꿇었다. 두 사람이 얼싸안고 기자회견한 자리에 안상수 전 인천시장이 뒤이어 섰다. 그는 "이 의원의 출마 포기는 타의에 의한 안타까운 결정"이라고 했다. 

그토록 고사하던 남경필 의원, 원희룡 전 의원의 차출도 현실이 됐다. 원내대표를 꿈꿔온 남 의원은 경기도에, 소장파 대선후보 1순위로 꼽히던 원 의원은 제주도에 내리꽂혔다. 이들은 새누리당 주류인 '친박(親朴)'이 아니지만 지방선거 경쟁력으로는 필승 카드다. 이들이 차출되고 나면 당내 비주류의 목소리는 더욱 줄어든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입장에선 일거양득이다. 어떤 회유와 압박이 이들에게 '선당후사'의 희생을 끌어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울산시장 출마를 선언했던 4선의 정갑윤 의원은 보름 만에 불출마 회견을 했다. 지난 1월 박 대통령의 인도·스위스 방문 때 동행할 정도로 관계가 돈독했던 정 의원의 불출마는 누가 봐도 석연치 않았다. 차기 원내대표 선거와 관련 있다는 설이 돌았다. 원내대표 유력 주자이던 이주영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서청원(당대표)-정갑윤(원내대표) 조합'이 거론되더니 이젠 차기 원내대표에 '이완구 추대론'이 피어오른다. 일종의 친박 단일후보론이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들은 마치 퍼즐조각 같다. 각각의 사건이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내막으로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퍼즐이 완성된 뒤의 모습은 쉽게 그려진다. 지방선거를 위한 최강의 라인업을 구축하는 한편, 원내대표 선거와 당권 선거를 거치며 새누리당을 더욱 '박근혜당'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박근혜 없는 선거'라는 건 헛말이라는 것이다. 

전국을 통틀어 이런 일관성에서 벗어난 퍼즐조각이 하나 있다. 지방선거의 절반이라는 서울시장 선거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바, 새누리당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는 정몽준 의원이다. 그런데 정작 '박심'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새누리당이 당초 10일까지이던 지방선거 출마 후보등록 신청 마감일을 15일로 늦춘 이유가 김황식 전 총리를 위한 배려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 전 총리는 14일 귀국 예정이다. 

새누리당 주류가 규칙을 바꾸는 무리수까지 감행하며 '김황식 모시기'에 공을 들이는 건 단지 경선 흥행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박 대통령에게 대선주자인 정몽준 의원은 여간 불편한 존재가 아니다. 정 의원이 "나는 서울시장이 되면 임기를 마칠 생각"이라고 2017년 대선 불출마 입장을 밝혔음에도 이걸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다들 정 의원의 서울시장 출마를 대선 도전을 위한 승부수로 본다. 정 의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본인이 가만히 있어도 차기 주자 0순위에 오르게 된다. 유력한 차기 주자의 등장은 원심력을 낸다. 박 대통령의 의중이 선뜻 정 의원에게 향하지 않는 이유다. 

박 대통령과 정 의원 사이엔 앙금이 남을만한 악연도 여러 번 있다.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 대통령은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어 무소속이던 정 의원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당시의 월드컵 붐에 힘입어 지지율이 상승한 정 의원은 이를 외면하고 독자 대선 출마를 강행했다. 사정은 곧 뒤바뀌었다. '국민통합21'을 만든 정 의원이 박 대통령에게 당 대표를 맡아달라고 하자 이번엔 박 대통령이 거절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전 의원이 창당기획단장이라는 이유였다. 얼마 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복당해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한동안 정치적 시련을 겪던 정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직후인 2007년 12월에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요청으로 지역구를 서울로 옮겨와 정동영 후보를 꺾는 공을 세웠고, 이를 바탕으로 전당대회에 출마해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이명박 정부에서 정 의원은 박근혜 견제 카드였던 셈이다. 2010년 세종시 이전 문제를 놓고 벌인 박근혜-정몽준 사이의 '미생지신(尾生之信)' 공방도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았다. 2011년엔 박 대통령의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을 두고 정 의원이 대필 의혹을 제기해 갈등한 적도 있다. 

이처럼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두 사람의 인연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보는 사람마다의 자유다. 그러나 1000만 서울 시민들의 미래를 놓고 벌이는 권력자들의 사적인 '밀당'이 집권세력의 서울시장 선거 복마전의 내막이라면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임기 초반 대통령의 기세에 눌려 '계급장 떼고' 맞붙을 용기 없는 정 의원과 흥행의 '불쏘시개'로 쓰고 주저앉히기엔 너무 커져버린 정몽준 변수를 통제 못하는 박 대통령의 어정쩡한 갈등이다 보니 불꽃은 튀지 않고 뒷말만 무성한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 정치와 경제를 비정상의 길로 이끈 선친들의 협업에 이어 '독재자의 딸'과 '재벌의 아들'이 현재 권력의 유지와 미래 권력의 선점을 놓고 서울 한복판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꼴 아닌가. 이 악연을 가장한 밀월을 '빅 매치'라고 부르는 우리는 또 뭔가. /시민의소리=프레시안 교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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