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도 이젠 한국 사람이에요"
"북한이탈주민도 이젠 한국 사람이에요"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4.02.12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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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생활 꿈꾸는 동네 처녀
주위에서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았으면…

‘내 힘으로 내 집 마련하고 싶어요’, ‘좋은 남자만나 행복한 결혼생활 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여성 누구나 바라는 희망사항이다.
박○○씨도 이런 꿈을 꾼다. 박 씨는 북한이탈주민이다.박 씨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났고 북한에서 자랄 당시 모범생이었다.
학교를 다닐 당시 반장을 도맡아 했고,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사상부위원장을 했다. 사상부위원장은 학급의 공산주의 사상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박 씨가 어릴 적 그녀의 집은 그나마 부유한 축에 속했다. 그래서 남들이 굶을 때 밥은 먹고 살만한 수준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남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교원대학교를 나와 선생님이 되고자 했지만 졸업증을 받을 수 없었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던 2003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경제적으로 가정에 큰 힘이 되던 어머니의 죽음은 박씨 가족에 위기로 다가왔다.
충격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는 결국 혼자 두만강을 건넜다.중국에서 한국인 전도사 김 선생님 부부를 만났다. 김 선생님 부부가 이끌어 결국 태국을 거쳐 2011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는 일단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광주의 한 전문대에 입학했다. 처음엔 교육문화 차이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학생들은 모여서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면 바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랐던 그녀는 중간고사에서 결국 백지를 냈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처음으로 나이 많은 언니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다른 학우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같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기말고사는 무작정 외워서 시험을 치렀다. 결국 괜찮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과에서 조교로 일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반찬을 다 먹고 그녀를 불렀다. “이 반찬 리필 좀 해주세요. 리필이 뭔진 알죠?”라고 물었다. 박 씨는 그때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는 “북한 사람이라고 하면 무식하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 등 지방마다 쓰는 말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지방 사투리를 쓰듯이 우리도 함경도 언어를 쓰는 것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믿지 않았고, 무시했다. 이렇듯 한국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한 회사를 다닐 때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보였다.“외국인들이네” 그녀가 말하자 옆에 있던 상사 한명이 “대한민국에선 북한이탈주민도 외국인이야”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분은 무심코 한 말일수도 있지만 저는 가슴을 돌로 맞은 기분이었어요. 그냥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이유 없이 던진 말에 저는 수없이 죽었어요”라고 말했다.

또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성급한 일반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박 씨는 “북한이탈주민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언론에서 ‘탈북자 김 모씨’라고 앞에 탈북자를 붙이더라고요. 그 사람이 탈북자는 맞지만, 그 개인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지 탈북자라서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닌데 (한국)사람들은 북한이탈주민 전체가 그런 것처럼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고,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은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경제적 지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녀는 “목숨 걸고 같은 민족이라는 믿음으로 한국을 찾았는데, 적응 못한다고 뭐라 하기보다는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돼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를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았다. 숨어 살았었는데 이제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포함한 북한이탈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한국에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박 씨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며 “우리(북한이탈주민)가 먼저 다가가는 것도 필요하고,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감싸 안고 같이 가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싶어 하며, 좋은 남편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다.
남자 소개시켜달라는 여자 친구들이 그러하듯, 옆집 아주머니가 늘 자랑하는 그 딸이 그러하듯, 너무 바빠 남자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는 사촌 누나가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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