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화공감 부드러운 직선. 박일남 목사
청년문화공감 부드러운 직선. 박일남 목사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4.02.06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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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역 인디밴드의 정신적 지주
발전하는 음악인 위해 공연장 대여

제법 한파가 불어 추운 날, 북구청 근처 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문화카페 ‘부드러운 직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들려오던 작곡가 줄라이의 ‘My soul’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뜻함과 함께 다소 작아 보이는 무대 위로 조명이 비추고, 그 조명 아래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이 의자에 앉아 리듬을 타고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전주 위로 그 학생의 랩이 덧씌워졌다.

잠시 후에 군밤장수 모자를 쓰고 캐주얼한 복장의 아저씨 한명이 들어와 악수를 청한다. 바로 부드러운 직선의 쥔장 박일남(47) 목사다.
박 목사는 2010년 4월 처음 문을 연 청년문화공감 ‘부드러운 직선’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젊은이들이 와서 공연을 하고 함께 즐기는 것이 너무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직선의 시작은 공연장이었다. 지금은 사업자등록 자체를 소극장으로 바꿨다. 학생들이 노래연습을 하고 있는 관계로 부드러운 직선 내부에서 박 목사의 이야기를 듣기가 힘들어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박 목사는 1968년 전남 자응(장흥)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누나들과 함께 지내며 공부하라고 시골에서 서울 영등포로 전학 보냈다. 당시 누나들은 산업전선에 뛰어든 속칭 ‘공순이’였다.
서울에서 3개 초등학교를 거쳐 결국 광주에 정착했다. 서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송원중학교, 광덕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주 어렸을 적 그의 꿈은 심리학 박사였고 중학생 때부터 목사로 꿈이 바뀌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별명도 ‘목사’였다.
학교와 교회밖에 가는 곳이 없었다. 운동을 좋아해 친구들과 공을 가지고 놀다가도 오후 4시가 되면 교회가야 할 시간이라고 먼저 자리를 떴다.
자율학습 시간엔 영어성경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별명이 목사다 보니 친구들이 상담하러 자주 찾아왔다.

그러다가 호남 신학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호신대에 들어간 후 혼란이 많았다. 한 교수님은 자신이 믿던 예수상이 6번 바뀌었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신학대 학생들이 시국투쟁을 많이 했었다. 박 목사도 그 당시 시국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투쟁이 끝나고 기도를 드리러 갈 줄 알았던 선배들이 막걸리집으로 향했다. 선배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담배를 피면서 시국에 대해 토론했다.
그때부터 신학 자체를 열심히 공부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신학대를 졸업하고 누나, 매형과 함께 사업을 했다. 철강, 철자재를 판매하는 사업이어서 5톤 화물차, 11톤 트럭을 몰았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1998년에 IMF가 터졌고 겨우겨우 현재의 아내와 결혼했다. 박 목사는 IMF가 터진 후 장모님의 고아원에서 2년간 버스기사로 일하다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목사가 되어 큰 교회에 청년담당목사로 들어갔다. 당시 280명이었던 청년부가 박 목사가 부임한 후 600명까지 불어났다.
교회 장로들을 포함한 어르신들은 개방적이고 청년 중심적이었던 그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박 목사는 “세상을 썩은 것 취급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어요”라며 “문화적 접근이 있으면 태도가 달라질 거에요. 결국 태도의 문제죠”라고 말하면서 현 기독교계는 변화를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내부적으로 마찰이 생기자 박 목사는 그 교회에서 나오게 된다. 큰 교회에 있다가 나오니 막상 살 집이 없었다. 일단 달방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당시 겨울이었다. 아이들은 3명이나 되고 혼자 벌어서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겨울에 건설현장에서 일명 '노가다'를 매일 했다. 박 목사는 그때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직선을 만들게 된다. 처음에 카페가 있는 교회로 부드러운 직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 측에서는 “커피를 파는데 어떻게 교회냐. 목사 그만두고 이거나 해라”라는 입장이었고, 박 목사는 “나는 목사로서 이걸 하고 싶다. 청년 문화를 이끌어가고 싶다. 일반 교회에서는 전도만 하려하고 청년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입장이었다.
결국 시작했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박 목사는 대학교 때 밴드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음악에 대해 알게 됐다. 부드러운 직선에서는 공연을 하고 싶지만 장소가 없거나, 돈이 없는 밴드들을 위해 공연장을 대여해준다.
하지만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밴드에게는 공연에 세워주지 않는다.
그는 “곡을 만들어 오지 않으면 공연에 세워주지 않아요. 발전이 없기 때문이죠”라며 “갈구는 사람이 있어야 발전이 있어요. 상업성을 띄지 않고 기획서를 잘 갖춰오면 무료로 공연장을 대여해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문화라는 것이 배고프고 힘든 것이고, 어느 누가 한 순간에 이끌어 간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라며 “개성있는 사람이 어떤 옷을 입으면 유행이 되듯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발전해가다 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음악인이 되지 않을까요?”라고 덧붙였다.

김기웅(19)군은 박일남 목사에 대해 “사장님이요? 저희가 학생이라 공연하기 힘든데 장소도 빌려주시고 많이 도와주시죠”라고 말했다.

인디밴드 Bucker의 리더 박경우(31)씨는 “목사님은 광주지역 인디밴드의 정신적지주 같은 분이세요. 아버지같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라고 할까요”라고 답했다.

박일남 목사는 사장님도 됐다가, 목사님도 됐다가, 아저씨도 됐다가, 형도 된다고 했다. 식으면 맛이 떨어지는 커피보다 은은한 향이 우러나는 차가 좋다던 그의 바람대로 광주지역 음악인들의 노래가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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