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을 네 번 건넌 여자
두만강을 네 번 건넌 여자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4.02.04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번의 강제 북송. 가족과 생이별
파란만장 北 탈출기

유난히 따스했던 설명절 연휴가 끝나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몸을 으슬으슬 떨면서 광산구 송광종합사회복지관 2층에 위치한 송광한사랑방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라○○씨는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옆집 아주머니를 닮았다. 말투를 제외하곤 누가 봐도 ‘한국 아줌마’다. 한사랑방 회의실에 마주보고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1965년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다. 북한은 11년(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지만 사실 그 당시 고등학교까지 나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배우고 싶어도 못배워. 공부하고 싶어도 배를 채워야 공부를 하지”
그녀는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배가 너무 고파 학교를 가지 않고 산에서 마를 캐서 관리소에 가져다줬다. 그러면 약간의 먹을 것을 상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공장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북한은 학교를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일을 시켰다.
그녀가 일했던 공장은 산 한가운데에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이 공장의 이름은 ‘물감 공장’이었지만 사실은 탄환 등의 군수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산을 넘어 일하러 가는 길은 경비초소를 3번이나 거치는 등 경계가 삼엄했다. 또한 근처에 묘지들이 많아 밤에 여자들끼리 모여서 이 길을 지날 때 무슨 소리라도 나면 꺅! 하며 모두 달려갔다.
라 씨는 “그때는 정말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재밌어요. 그땐 그 길이 얼마나 무서웠던지”라며 추억을 되새겼다.

그 후 1987년 그녀 나이 23살에 소개를 통해 남편에게 시집갔다. 남편의 집은 함경남도 신포시에 있었다.
남편은 상업관리소 자동차 운전수로 일했다.

그러다가 1994년 김일성이 죽었다. 이로 인해 기존에 나오던 배급은 중단됐고 길거리에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북한 사람들은 이때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렀다.
아사(餓死)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인구가 줄어들었다. 이미 정부가 책임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에 북한정부는 ‘자립갱생 하라’면서 제한된 시장경제체제를 허용했다.
큰 규모는 허용하지 않고 소규모로 시장을 개방했으며,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물품만을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장소가 너무 좁아 골목상이 생겨났고, 불법거래가 시작됐다.

라 씨는 기차역 앞에 굶어 죽은 사람들을 보고 ‘우리도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앞섰다.
어느 날 친정집에 갔을 때 ‘남양에 가면 중국 사람들이 먹을 것도 주고 도와준다더라’하는 소문을 듣고 남양으로 갔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산에 가서 나무를 때와 팔고, 강냉이 가루를 산나물에 섞어 죽을 끓여 먹었다. 두 달 있는 동안 굶어 죽을 것 같았다.

결국 1997년 6월, 그녀와 남편은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기 전에 두 사람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 허리띠로 맞잡은 손을 묶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가다가 갑자기 깊은 곳으로 쑥 빠졌다. 중국에서 여객선을 운영하기 위해 파놓은 것이었다. 다행히 남편이 수영을 잘해 중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가서 먹자며 목에 걸어놨던 꽈배기는 물에 젖어 이미 먹지 못하게 돼버린 후였다.
중국에서 보니 중국쪽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대낮같은데 북한쪽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워서 마치 ‘죽은 나라’같았다.

중국에 있는 동안 나무를 가져다 장작을 패고, 남의 집 벽 페인트칠을 해주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살면서 지냈다.
하지만 1998년 5월, 중국 경찰에게 잡혀 강제 북송됐다.
라 씨는 “고문 좀 당하고, 돈이 있으면 살아나요. 돈 없으면 큰일나지. 그래서 항상 돈을 (나를 지켜주는)내 무기다 생각하고 가지고 다녔어요.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르니까”라고 말했다.
이듬해 11월 그녀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고, 또 2000년에 잡혀 들어가 그 이듬해 또 탈북했다. 하지만 2004년 2월. 그 동안 라 씨와 남편만 잡혔었는데 이때는 가족 모두가 잡혀 들어갔다. 라 씨의 남편과 아이들은 심한 고문에 지쳐버렸다. 결국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북한에선 내가 널 책임지기 어려울 것 같다”했고 아이들은 “엄마라도 가서 행복하게 살아”라고 했다.
2004년 8월, 라 씨는 혼자 두만강을 건넜다. 이때 가족과 생이별을 한 후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다.

중국에서 지내다가 2011년 2월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국정원의 조사를 받은 후 ‘하나원’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웃는 얼굴로 임했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자 눈이 슬퍼졌다.
“아무 때고 집 생각이 나요. 가슴 속에 재가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아요. 웃고 있지만 마음은 고향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 있어요. 아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에 뭐가 얹힌 듯 답답해요”
북한에서 그녀는 행방불명된 사람이다. 가족들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다. 혹시라도 가족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 이탈주민들은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제3국에 표류한 후 어느 나라로 입국할 것인지 물으면 대부분 ‘대한민국’을 적는다.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들어와 살다보면 너무 힘들다.
‘빨갱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있고, 탈북주민이 한 번 범죄를 저지르면 모든 북한 이탈주민이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우도 많다.

북한 이탈주민들은 이념과 사상을 떠나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북에 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봐 전화도 걸 수 없고, 언론에 이름과 사진이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진심어린 관심’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