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만의 해후
34년만의 해후
  • 김상집
  • 승인 2014.01.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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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지난 12월 30일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광민회) 송년회를 마치고 밤 11시 반에야 귀가했을 때 뜻밖의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정연효였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맞서 싸우다가 YWCA에서 헤어진 지 34년만에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26일 오후 3시 도청앞 분수대 궐기대회에서는 대학생과 예비군들이 자원하여 시민군을 조직하자는 선언문이 낭독되었고, 이에 따라 대학생들은 YWCA로 가고 예비군들은 5열 횡대로 대열을 이루어 도청 정문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상황실장인 박남선이 권총을 뽑아들고 총기를 지급할 수 없다며 정문에서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 예비군들은 향토방위를 위해 총기를 지급하라며 연좌하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때 윤상원 대변인이 나타나 총기를 지급할 터이니 YMCA로 가 있으라고 하여 예비군들은 YMCA로 들어가 대기하게 되었고 저는 대학생들이 모여있는 YWCA로 갔습니다.

YWCA에서는 대학생 10명을 1조로 7개 분대를 편성하였는데 당시 분대장만은 군대를 갔다온 아는 사람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1분대장은 1년 후배인 최영선으로 하였고 소대장을 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7분대는 들불형제들이었습니다.

분대편성이 끝나고 제식훈련을 한 다음 YWCA 대학생들을 인솔하여 도청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청 회의실에서 윤상원 대변인을 만나 총기를 지급받을 예정이었지만 윤상원 대변인은 그때 최후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윤상원 대변인은 시민군을 자원한 대학생들을 찾아와 총기를 지급하기 전 훈시를 하였습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이제 민주투쟁위원회로 바뀌었으며 대학생들에게 시민군으로서 민주정부수립의 그날까지 싸워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총기를 지급받은 다음 들불팀과 대학생 1개 분대는 YWCA로 돌아왔습니다. 27일 아침 전남대 문선반에 들어가 투사회보를 대량으로 찍어낼 계획이었는데 당시 전남대는 변두리여서 자주 공수들이 출몰하여 민간인을 죽이곤 하였기 때문에 들불팀과 대학생 1개 분대를 배치하여 자체방어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선 YWCA에서 계엄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정연효가 YWCA 경비대장을 맡았습니다. 경비대장 정연효는 7,80명이나 되는 송죽회 등 대자보팀과 4,50명에 달하는 투사회보·궐기대회팀들의 안전을 위해 YWCA 정문을 책걸상과 탁자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정문을 막아버리고 대신 YWCA 건물과 옆 병원 사이 2m 높이의 담에 철망을 비스듬히 설치하고 만약 계엄군이 쳐들어올 경우 이 철망을 딛고 담을 넘어 피신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계엄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송죽회 등 대자보팀과 경비를 제외한 투사회보·궐기대회팀 모두가 정연효가 준비해놓은 철망을 타고 담을 넘어 피신하였습니다.

원래 계엄사 합동수사단은 녹두서점에서 YWCA로 본부를 옮긴 광주 운동권을 일망타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YWCA는 들불과 대학생 등 경비 일부만 남고 녹두서점도 저와 정현애 형수와 정현순만 남았습니다.

녹두서점에서 저와 정현애 형수는 카빈총과 수류탄 화염병 등 무기를 하수구와 골목밖으로 던져버렸고, 상황일지와 대자보 투사회보 궐기대회 자료와 시민군을 자원한 대학생 명단 등 증거문건도 모두 소각해버린 상태였습니다. 도청에 있는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상무대영창에서 정상용, 이양현 선배는 최소 10명에서 15명은 사형을 당할테니 조서를 잘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을 당하더라도 조서를 잘 받으면 사람을 하나씩하나씩 살려내는 길이라고요. 결국 단 한명의 사형집행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정연효의 지혜로 항전의 주체들이 몽땅 안전하게 피신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정연효는 계엄군과 교전이 벌어지자 YWCA 2층에서 이웃집 지붕과 지붕을 넘고, 넘어 피신했다고 합니다. 총성과 붉은 총알포물선 사이를 헤쳐 나가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지옥을 빠져 나간다면 주님을 위해 남은 삶을 살겠습니다.”라고요.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정연효는 며칠 뒤 합수단에 붙잡혀 경비대장으로 지목되었으나 겨우 부인하고 훈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성에 취직하여 토쿄지사에 근무하던 어느 날 홀연히 YWCA에서 옆집 지붕을 넘고넘어 탈출하던 때의 기도 곧 하나님과의 약속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고교 동창 중 누구보다도 잘 나가던 정연효는 순간 모든 일을 내려놓고 곧장 선교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니카라과에서 선교사로 근무하던 중 오랜만에 다시 광주를 들렀다 저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정연효를 무척이나 많이 찾았지만 동창들 중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겨우 최근에야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있다는 말만 들었는데 이렇게 34년만에 정연효를 만나 2014년 새해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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