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국 엄마 ‘임예린’
그녀는 한국 엄마 ‘임예린’
  • 권준환 수습기자
  • 승인 2013.12.25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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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한국 온 지 13년
아이들 대학 보내는 것이 목표

24일 오전 10시. 초등학생 아이들을 다 학교에 보내고 난 한가한 시간.
임예린씨의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빨간색 털모자를 썼고 화장기 없는 민낯이었다.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큰 딸은 5학년, 작은 아들은 4학년이다. 그녀의 고향은 필리핀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2000년에 한국으로 왔다. 당시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가장 답답했다.
“지금도 한국말 잘 못하지만, 그 때에는 너무 답답했어요. 그래도 남편이 잘 이해해줘서 다행이었죠”라며 웃었다.
그녀는 매운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김에다 밥을 싸먹는 것 뿐이었다. 지금은 많은 한국음식을 좋아하지만 매운 음식은 여전히 못 먹는다.
아이들이 맛을 보고 맵지 않으면 “엄마 먹어도 될 것 같아”라고 말한다며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필리핀에 있을 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속옷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했고, 아침에는 신발 등을 만들어 파는 작은 사업을 했다.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이다.
“당연히 힘들었죠. 그래도 참고 해야 했어요. 동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녀는 결국 약속을 지켰고, 그녀의 동생들은 대학을 나와 현재 은행 지점장 등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중 당시 무역을 하던 애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친한 친구가 속 썩고 있지 말고 한국으로 가자고 제안해 친구와 같이 한국으로 왔다. 다행히 지금의 남편이 좋은 사람이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서구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필리핀 이름은 아닐리 디 라 크루스(Annely De La Cruz)다. 2003년에 한국 국적으로 변경했지만, 이름은 아닐리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다 2011년에 임원지 수녀의 도움으로 임예린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
한국에 처음 정착할 때부터 임원지 수녀가 친엄마처럼 챙겨주고 도와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그녀가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던 2002년에 가족들과 함께 필리핀에 너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아이들은 두고 가라고 했다. 당시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갔다는 말들이 많이 나올 때였다.
시어머니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고 슬펐다고 했다.

이번에 필리핀을 휩쓴 슈퍼태풍 하이옌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몇 장을 보여준다. 지붕이 날아간 집 한 채가 찍힌 사진이었다.
그녀는 “너무 슬퍼요. 동생 집이 없어요. 다 없어져 버렸어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예린씨는 현재 한 영어학습지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봉급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대한 절약하며 살고 있다. 그녀의 목표는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대학등록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커피 한 잔 값도 아낀다.
그녀는 “필리핀은 오늘을 살아요. 사고 싶은게 있으면 바로 사고 내일 또 일해서 벌면 된다는 생각이 강해요. 하지만 한국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심해요. 아이들 대학등록금 같은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래를 항상 계획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큰 딸이 “엄마”라고 말했을 때라고 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아이들이다. 그만큼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크다.
그녀는 다문화 아이들을 왕따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부색이 약간 달라도 엄연히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아이들이다.
또한 외국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고 예쁘게 봐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의 대학등록금을 준비하고, 내일을 걱정하는 임예린씨는 이미 ‘한국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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