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자, 여성이 안전하게 사는 ‘세상’ 만들기
이명자, 여성이 안전하게 사는 ‘세상’ 만들기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2.23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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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친화도시 광주, 텃밭 일구는 여성일꾼들(7)
오월 어머니집 관장

지금 시국이 말이 아니다. 여기저기 캠퍼스 곳곳, 그리고 전봇대에도 대자보가 붙여있다. 전국에는 청춘들의 외침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로 대학생들의 정치적 관심이 들끓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오월어머니집 이명자 관장도 이 같은 상황에 말을 보탰다.

18일 이 관장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동명동 오월 어머니집은 마침 월요일, 수요일에 열리는 치유프로그램 노래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 교실은 올해 마지막 수업이었다.

▲오월 어머니집 이명자 관장
여린 소녀가 거리에 투사가 되기까지

오월어머니집은 5.18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 아픔을 달래주는 곳이다. 올해 마지막 수업을 뒤로 어머니집에서 상처를 달래고 있는 유가족들은 마지막 쫑파티 겸 다가회를 열면서 이 관장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 관장은 “어수선한 사회속에서 무관심한 젊은이들을 보고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이번 대자보를 보고 아직은 우리나라가 살아있구나, 희망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 뭉클하다”며 “지금까지 민주화운동에서 젊은이들이 앞장섰는데 이번 대자보로 젊은 세대들이 끊임없이 시국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오월 어머니집은 수십명의 어머니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너무 비좁은 공간이다. 그녀는 “내년 4월쯤이면 양림동 오거리 근처에 오월 어머니집이 이전을 할 것 같다”며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어머니들이 더 편히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출신인 그녀는 1950년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은 소녀처럼 여린 외모에 앞장서서 나서는 성격은 아니였다고 한다.

가끔은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묻곤 한다. 그녀는 “80년 5월을 함께 보내고, 남편이 사형수가 된다면 어찌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냐”면서 “나에게 5.18은 80년의 아픔을 서로 공존하면서 서로 어루만지고 살아가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큰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광주여상을 졸업하고 지난 1968년 광주은행 설립 직후 행원시험을 통해 은행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은행생활을 하다 지금의 남편 정동년씨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이후 1974년 결혼을 하고 보통의 평범한 주부처럼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1980년 4월 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밖에 되지 않아서 큰 불행이 닥쳐왔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5월 민주화운동

아직 얼굴에 붓기는 남아있어 퉁퉁 부은 상태였지만 청천 벽력같은 소식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욱 붓게 만들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녀는 “갓난이를 막 낳고 얼마 되지 않아 5월 17일 남편은 잡혀들어가 사형수가 됐다”며 “전남대 복학생 대표로 서명을 한 계기로 내란수괴로 잡히고, 갓난이가 있는 상태에서 가택수색을 당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그 이후 그녀는 5.18 당시 내란수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정동년 구명운동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 전선에 뛰어들어 거리에 투사가 되면서 지역 여성운동가로 거듭났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는 광주전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장을 맡으며 5.18에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지난 1995년 전라남도의원을 시작으로 사회적 약자 장애인, 여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1999년에는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대표를 맡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여성의 문제를 어루만졌다. 시대에 맞는 여성운동의 확장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이 관장은 “90년대까지만 해도 암울했던 시절로 더 현장감 있는 운동을 했던 것 같다”며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단합이 잘되고, 한 가지 사항이 터지면 하나로 결집되어 일을 척척 해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정겨운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어 “당시 광주여성단체협의회 김필식 회장님과 함께 여성운동을 전개했는데 여성단체연합과 사이가 참 좋았다”며 “일을 할 때는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민·관이 협력해서 어떤 사항을 해결해야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성운동가

그렇게 그녀는 여성문제를 진단하면서 시민의 입을 대변해 지난 2006년 광주광역시의원에 당선되면서 여성의원으로써 소외된 곳에 힘을 실어주는 일에 더욱 열을 올렸다.

시의원 당시 가임여성 공공 수영장 요금 감면 조례, 교통약자지원 관련 조례, 공연장 장애인 관람석 조례 발의 등 약한 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현재는 오월어머니집에서 2년 넘게 관장을 하면서 광주여성인권지원센터 대표까지 겸해 평범하게 살아가는 지역 여성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

광주여성인권지원센터는 성매매에 노출된 가출 청소년, 성매매 청소년을 보호하는 곳으로 상담소, 아지트, 쉼터로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곳이다.

이 관장은 “여성인권지원센터 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8명 정도가 있는데 이들이 점점 좋아져 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다”며 “인권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도 정말 고생이 많고, 힘내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전했다.

요즘은 왠지 모르게 여성이 점점 더 많아지는 시대인 듯 하다.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는 반증이다.

앞으로 이 관장은 “바램이 있다면 여성단체와 광주광역시가 함께 ‘여성친화도시’ 사업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커나가는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지켜만 보고 있는 기성세대도 문제이고, 모든 사람들이 더욱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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