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지역 여성들도 ‘정치’에 관심 가져야 한다
김경천, 지역 여성들도 ‘정치’에 관심 가져야 한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2.10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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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친화도시 광주, 텃밭 일구는 여성일꾼들(6)
김경천 광주 YWCA 전 사무총장(제16대 국회의원)

“살림도 여성이 잘하는 것처럼 지역사회 살림, 국가살림도 여성이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우먼파워가 거세지고 있는 만큼 여성 관련 조례, 단체 등 다양한 활동들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 중 전국적인 조직으로 활발한 여성 시민운동단체로는 YWCA가 대표적이다. 광주에도 광주 YWCA가 있다. 광주YWCA와 뗄 내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운동가 김경천(73) 광주YWCA 전 사무총장을 북구 유동 YWCA 2층 사무총장 집무실에서 만나봤다.

지역살림 이끌어 가는 여성 지도자

그녀는 평소 파란 정장을 즐겨 입는다. 국회의원 시절 그녀의 파란색 정장은 청렴함을 대변해주는 듯 어느덧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마치 파란색 정장을 즐겨 입던 영국의 최초 여성 수상 마거릿 대처 수상을 보는 듯하다.

그녀는 바쁜 일정 속에 꼼꼼히 하나하나씩 챙겨가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하필 그날은 광주YWCA 회원증모 2차 보고회가 있었던 터라 수많은 사람들이 사무실을 오고가는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김 전 사무총장의 파란 정장은 더욱 눈에 띠었다.

김 전 사무총장은 13년 만에 광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지난 2000년 제 1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활동을 하고, 2008년에는 김천과학대 총장으로 5년을 지내다 돌아온 것이다.

최근 근황을 묻자 “지금은 광주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소심당 ‘조아라’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Y에 있던 작은 기념실을 확장시켜, 넓은 부지에 기념관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며 “조아라 선생님의 생가를 복원하는 일도 동시에 하고 있는데 나주박물관 부근에 있어 11일에도 나주시장을 만나기로 됐다”며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열정이 넘치는 김 전 사무총장은 1941년 전북 무주 안성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래 어린 시절 본명은 ‘김정자(貞子)’였다. 딸만 네 명인 딸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무주 안성초등학교를 다니고, 남녀공학인 안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웅변 시작해 꿈꾸기 시작한 정치인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똑똑하고 야무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웅변을 배우기도 했다. 당시 웅변 원고에는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쳐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했던 터라 앞에 나서서 말하는 일에 능숙했고, 그때부터 법관이나 훌륭한 정치가를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는 중학교 교육까지만 받아도 많이 받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김 전 사무총장은 “유교학자셨던 할아버지는 ‘여자가 배움이 많으면 집안에 어른이 둘이 되어 집안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진학을 말리셨다”며 “그러나 내게는 고모 6분이 계시는데, 그 중 3분이 광주에 사셨기 때문에 광주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모 댁에서 살게 되고, 1957년 3월 광주여고에 입학을 하게 됐다. 그 이후 김경천은 여고시절 반장을 하고 활기찬 여고생활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그때서야 “일제시대 지었던 이름을 개명해야 나라에 쓰임 받는 훌륭한 여성이 될 수 있다며 ‘하늘을 공경하며 정의롭게 살아라’는 뜻으로 ‘경천’이란 이름을 선물로 줬기 때문에 지금에 ‘김경천’이 있을 수 있었다.

광주에서 함께 살게 된 고모집 담을 같이하는 바로 옆집은 광주YWCA에서 운영하는 육아시설 ‘성빈여사’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연스럽게 YWCA와 인연의 끈을 맺고, 인생의 절반을 Y에서 보냈다.

1960년 여고를 졸업한 뒤 Y에서 재건국민운동, 사회사업지도자 연수과정을 받고, 1962년 10월 광주YWCA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나간 세월을 더듬어 보며 “제게는 어머니가 총 3분이 있다”며 “친어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10년 전 돌아가셨지만 YWCA활동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이끌어주신 조아라 어머니, 정치의 길로 적극적으로 이끌어주신 이희호 여사님이 있다”고 털어놨다.

▲김경천 광주YWCA 전 사무총장은 자신에게는 3명의 어머니가 계신다고 한다. 그 중 한명은 소심당 조아라 회장님이라고 한다. 그녀는 현재 소심당 조아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으며 기념관 건립, 생가복원에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여장부

특히 “조아라 회장님은 나에게 딸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시면서도 늘 엄격하게 ‘네 실수가 내 실수고, 네 칭찬이 내 칭찬이다’라고 말해 그 깊은 속마음을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렇게 김 전 사무총장은 수십 년을 Y에서 활동하면서 내로라하는 여성 운동가, 민주화에 힘쓴 사람들과 지내며 배워오고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는 늦게 6년 뒤인 1966년 전남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남들보다 늦은 입학이었기에 더욱 학구열이 치솟았고,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또한 대학시절에 학보사 기자 시험에 합격해 학생 기자활동까지 하는 당찬 여성이었다. “그때는 전남대에 방송실이 없었는데, 초대 방송실 설립 멤버로 실장을 맡아 학보사와 방송실 활동을 했다. 교내 방송으로 삭막했던 전남대 캠퍼스는 보다 활기찼고, 지금의 전남대 방송실(CUB)이 있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눈에 뛰게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그녀는 단연 전남대에서 유명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서 일하기를 권유가 이어졌다. 하지만 YWCA와 인연을 끊지 않고 대한 YWCA연합회 대학생부 호남지역 간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학창 시절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광주여고 총동창회 회장, 전남대학교 총동창회 이사·부회장을 도맡아왔다.

그녀는 Y에 남아 70년대를 소비자 보호운동과 신용협동조합운동 등 인권운동을 하며 지내왔다. 31세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나서도 Y활동에 매달렸다.

그러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며 인권운동을 하던 도중 1978년 6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전남대 교육헌장지표 사건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인쇄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 세 아이를 두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보고 싶은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수사과정 고문 속에서 호흡장애를 일으켜 죽을 뻔도 했지만 신념으로 견뎠었다”고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국가살림, 인구 절반 차지하는 여성도 도맡아야

결국 주변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1심과 2심을 거쳐 3심에서 3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녀는 3년 집행유예로 조심했어야 했지만 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또 한 번 경찰서를 거쳐 보안대로 넘어가는 고난의 세월을 지냈다.

암흑 같았던 70~80년대를 보내고 줄곧 광주 YWCA에서 시민운동, 인권운동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1987년에는 광주YWCA사무총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1997년 큰 감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Y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고 조아라 회장과 함께 지내왔던 이휘호 여사의 남편 김대중 대통령이 선출된 것이다.

김 전 사무총장은 “이희호 여사께서는 여성의 시대를 맞이하는 21세기를 앞두고, 지구 절반이상인 여성들도 이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 각 곳에 참여해서 부정과 비리가 없는 정의롭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고 했다.

이후 그녀는 2000년 1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정치, 교육, 여성, 종교,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살림을 도맡았다. 최근에는 김천과학대에서 보내왔던 5년을 정리한 책도 발간했다. 기자에게도 그녀의 추억이 흠뻑 묻어있는 책을 건넸다.

그녀는 대장부처럼 모든 분야를 이끌어왔지만 아직도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다.

이처럼 위대한 광주 여성으로 빼놓을 수 없는 김 전 사무총장은 “정치라는 것은 우리 생활과 굉장히 밀접 되어 있고, 정치가 잘돼야 우리 사회와 나라가 안정된다”며 “정치 따로 생활 따로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치권에 속해 있다. 여기에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정치적으로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세상을 좋아질 것이다”고 잘 살 수 있는 국가가 되는 날을 꿈꾸고 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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