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고 불러다오!"
"오빠라고 불러다오!"
  • 권준환 수습기자
  • 승인 2013.12.0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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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즐기는 ‘올댓재즈’팀 노익장 과시
광주영상예술센터서 매달 한 차례 공연

화정사거리와 광주시교육청 사이에 위치한 건물 지하. 색소폰과 드럼의 경쾌한 연주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에 이끌려 지하로 내려가자 웬 아저씨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직 할아버지라 부르기엔 멋쩍지만 나이도 제법 들어보인다.
색소폰, 드럼, 기타 소리가 어우러진 합주를 듣다보니 나도 모르게 발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잠시 앉아 기다렸다. 연습이 멈추고 휴식 시간에 부드러운 곡선의 눈매에 복스러운 코를 가진 아저씨 한 분이 나와 마주 앉았다.
말투는 차분했고 목소리는 다소 작았다. 그는 재즈 공연팀 ‘올댓재즈’의 리더면서 한국재즈협회 광주지회장인 최기철(66)씨다.
올댓재즈의 멤버는 모두 8명이고 그가 운영하는 지하 재즈카페는 30평이다.

올댓재즈는 회비를 걷어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광주영상예술센터에서 무료로 공연을 해오고 있다. 공연에는 실용음악과 대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온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이 와서 공연을 봐주면 기쁘죠. 대중가요에 익숙한 친구들이 재즈에도 관심 가져 주면 얼마나 (우리가) 좋겠어요.”

기철씨는 매달 공연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한국재즈협회에서도 크게 지원해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광주지역에는 재즈협회에 가입한 팀이 5개가 있어요. 전국에서 광주가 제일 열심히 활동하는 것 같아요.” 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1948년에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친구들과 취미로 시작한 보컬이 어느새 그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있었다.
그렇게 그룹을 만들어 미8군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아직 연주 실력이 좋지 않던 시절, 불러주는 곳이 없어 참 힘들었다고 했다. 먹고는 살아야하고, 숙식 해결이 안 될 때도 다반사였다.
집안이 먹고 살 만해도 음악을 한다고 하면 일체의 도움을 안 주던 시절이었다.

그는 재즈 공연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안 가본 데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아내와 두 딸은 서울에 있고 팀원들과 같이 하숙하며 공연을 하러 다녔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어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 있었다.

전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 번은 제주도에서 공연을 할 때였다. 드럼을 치는 동료의 장모님이 찾아 오셨다.
땀 흘리며 열심히 드럼을 치고 있는 사위를 보며 안쓰럽고 고생한다며 눈물을 흘리고 가셨더랬다.
“그 친구는 즐기면서 하고 있는데, 장모님 눈에는 땀을 비 오듯 흘리니까 힘들어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가장 힘든 점이라고 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이 강해 고집이 쎄요. 고집 안 쎄면 음악 못해. 그래서 서로에게 맞춰가는 것이 가장 힘들지.”

그러다가 1974년에 광주의 한 관광호텔에서 공연을 1년 간 하게 됐고, 그 계기로 광주와 인연을 맺어 1996년 광주에 정착했다.

그에게 ‘올댓재즈’ 자랑을 해달라고 했다.
“자랑할 게 뭐 있나. 그냥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지.”

그는 대중에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많은 이가 재즈음악을 즐기고 감동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재즈음악을 즐기고 공연하고 있는 ‘올댓재즈’ 회원들.
그들은 ‘아저씨’가 아닌 ‘오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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