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아, 광주·전남 여성운동 ‘현장 중심에 서다’
황정아, 광주·전남 여성운동 ‘현장 중심에 서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1.28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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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친화도시 광주, 텃밭 일구는 여성일꾼들(5)

거리에 셀 수 없는 노란 은행잎들이 사방팔방 흩어져있다.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광주에 눈이 쌓여갔다.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의 황정아(47) 전 대표를 만나기 위해 풍암지구를 찾아갔다. 그녀는 지난해까지 대표를 맡았다.

풍암동 신암초등학교 앞에서 만난 한 황 전 대표는 “오랜만이네요~!”라는 말을 하며 반가운 내색을 비췄다. 그리고 추위로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동네 조용한 커피숍으로 장소를 옮겼다. 황 전 대표와 기자는 늘 집회나 기자회견장에서 만났던 터라 이 날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황정아 전 대표
장녀 역할 다하는 책임감 갖고 자라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 질문에 그녀는 “아!, 이제 잠시 현장에서 떨어져 좀 더 여성 페미니즘에 대해 전문적으로 진단하기 위해 재미있게 공부하며 지내고 있어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현재 전남대 대학원 NGO학과 수업 중에서도 여성관련 과목들을 들으며 내공을 쌓고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건넸다.

현재 황 전 대표는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현장에서 활동 중에 “뭐가 문제지? 왜 문제지? 어떻게 문제가 생겼지?”라는 물음표를 던지게 했던 의문의 구멍들이 점점 메워지고 있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했다.

그녀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4남매 중 장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 속에 고등학교 1학년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해 그 책임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운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시절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황 전 대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동생들은 내가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됐다”며 “공장을 다니면서 84년~85년 노동운동을 점점 알아가게 되고, 대투쟁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보내왔지만 그땐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노동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다가 지난 1995년 결혼을 하게 되면서 광주로 올라오게 됐다. 황 전 대표는 결혼 이후 남들처럼 근 몇 년간은 평범한 주부로 지내왔다.

경력단절 여성 모두 공감하는 고민들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던 중 광주여성노동자회(이하 여노)를 자주 오가고 하던 선배의 권유로 행사 때 동참하는 수준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노에서 만난 여성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고민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일과 가정 양립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황 전 대표는 “내가 경력단절여성이었던 상태로 참여하게 됐는데 내가 가진 문제는 굉장히 많은 여성들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었다”며 “여성의 노동은 부업처럼, 부수적인 노동, 보조생계자라고 취급받고 누구나 겪고 있는 고민거리였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여성운동은 전문적인 지식인 패밀리가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생활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여성들이 운동영역으로 끌어내 문제를 이슈화 시키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하지만 초창기 그녀는 낯가림을 갖고 있던 성격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억척스럽지도 못했다. 나서기도 힘들었다. 일과 가정을 돌보느라 억척스러워진 여성들처럼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 전 대표는 “그 수준까지 이르렀던 그녀들은 삶에 대한 열정과 의식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며 “여성문제는 자발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고, 가장 중요한 ‘자발성’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지난 2003년부터 여노에서 상근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작한 해부터 2006년까지 여노에서 활동을 하면서 줄곧 여노 회장직을 맡아왔다. 그리고 밖에서 연대 사업을 시작하면서 광주전남 여성들의 입을 대신해 입장을 대변해주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여성운동은 제게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며 “양육 시기가 지난 후에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삶의 가치관을 두고, 일상에 감사하게 됐다”며 “나를 키워주고 성장하게 한 활동들이었다”고 말했다.

여성운동,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함께하길

한편 여러 시민단체와 연대활동 과정 중에서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활동이 막연하게 재미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고 지난 2008년 여연으로 옮겨 사무국장직을 맡으며 몸을 담갔다.

그녀는 여연에서 막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법정 공방까지 가게 되는 큰 사건을 겪게 됐다. 당시 광주시 김 모 의원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불거지고 여연에서는 공인의 ‘도덕성’을 문제 삼고, 피해 여성의 입장을 대변했다.

분명 피해여성에게 합의금을 주고, 합의서를 작성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지만 기자회견장에 피해여성이 나타나 “그런 적 없다니까요!!”라는 말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를 빌미 삼아 의원 측에서는 명예훼손·손해배상 소송을 걸고, 여연과 법정공방에 이르렀다. 하지만 법정에서도 흔들림 없이 대응해갔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피해여성은 꽃뱀이었다고 알려졌다고 한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녀는 “여연에서 앞장서서 나섰던 사람들은 내적 상처가 컸지만 굴하지 않고 극복해냈었다. 꽃뱀한테 당한 의원인데 여연이 한 사람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했네라는 잘못된 소문으로 둘러싸는 사태까지 이르렀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아무리 옳은 일을 하더라도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가슴 한 구석에 아픈 곳이 있어서 안하려고 마음먹다가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성의 인권을 지켜낼 수 없기에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털어놨다.

이후 그녀는 2009년 여연 대표를 맡고, 지난해 2012년까지 올바른 여성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묵묵히 걸어왔다. 여성이 겪고 있는 문제 현장에서 늘 중심에 서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다양한 문제 현장에서 서있었던 황정아 전 대표는 광주·전남 여성운동 그룹의 원로급 수준이 됐다. 그래서 앞으로 광주·전남 여성운동을 이끌어나갈 후배들에 대한 고민도 많다.

앞으로 황 전 대표는 “NGO활동, 시민활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공유된 가치관 속에 활동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고,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함께 갈 수 있도록 됐으면 좋겠다”고 여성운동의 미래를 소망하고 있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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