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미봉, 남편바라기에서 ‘여성운동가’ 되기까지
염미봉, 남편바라기에서 ‘여성운동가’ 되기까지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1.21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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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친화도시 광주, 텃밭 일구는 여성일꾼들(4)

▲한국여성의전화 염미봉 공동대표
“남편 바라기로 현모양처 삶을 살았던 제가 이제는 자신 있게 여성인권운동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0~80년에 비교해 현재 여성들의 지위는 큰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남성 옆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조용히 해오던 여성들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반(反)가부장제 투쟁에 앞서왔다.

그러한 과정 속에 현재 21세기에는 정치·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 중심에는 여성운동단체와 여성운동가들이 기초를 다졌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남성중심, 가부장적 환경 속에서 자라

한국여성의전화 염미봉(59) 공동대표도 동분서주 뛰어다녔던 이 지역 여성운동가 중 손꼽히는 인물이다. 일주일에 몇 번씩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바쁜 교육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녀를 광주여성의 전화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로 살아왔던 그녀는 여성운동을 접하기 전 여성의 문제는 남 일처럼 여기며, 그저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았다. 평범한 주부에서부터 여성인권운동가가 되기까지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염 대표는 8남매 중 4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1973년 이화여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 시절만 해도 여성이 대학교육까지 받는 경우는 거의 찾기 드물었다.

그녀의 가정환경은 유복했지만, 가부장적인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1977년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 지역 학교 교사로 지내오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1979년 광주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를 떠올리며 염 대표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임신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뒷바라지 하는 전업주부를 지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왜 그땐 그렇게 극성이었는지 모르겠어요”며 “뭘 하겠다는 게 아니고, 애들 교육, 논문을 쓰던 남편의 보조 역할을 해주려고 컴퓨터 교육도 받았었죠.”라고 말했다.

어느 날 광주에 지내다 서울에서 동창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는 항상 광주에서 서울까지 남편과 함께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동창회로 서울에 혼자 가야한다는 사실에 겁부터 났다. 결국 동창회는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던 그녀였다.

자녀 성교육 시키기 위해 시작한 활동

▲한국여성의전화 염미봉 공동대표
그러다 그녀가 여성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지난 1990년부터다. 지인의 소개로 광주 여성의전화를 처음 소개 받았을 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여성’의 전화야? 여성, 남성 편 가르긴가? 남성의 전화는? 인간의 전화는? 여성이 도대체 여성한테 무슨 큰 문제가 있길래 여성의 전화가 따로 있는 거지?”라는 물음표를 던졌다.

하지만 교육전공을 했던 그녀는 나름대로 애들에게 인권적인 시각으로 교육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자녀가 성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변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성교육을 배운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아이들을 위한 성교육책을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 그녀는 “12살의 봄이라는 성 교육책을 읽어보면서 뭔가 양에는 안 차고, 직접 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서 자녀 성교육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라며 “내가 제대로 알고 있어야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킬 수 있겠다 생각했지요”라고 털어놨다.

그리고 여성의전화에서 상담원으로 지내면서 점점 새로운 여성주의로 바라보는 시각을 기르게 됐다. 이전에는 보통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밤늦게 다니거나, 술을 같이 마시거나하는 여성들이 당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상담을 통해 완전히 그 틀을 깨게 됐다.

9살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가 30살이 되서 가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 어린 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살았던 여대생이 애인과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 등 나이에 관계없이 기막힌 사건들이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례를 상담하면서 “그동안 내 스스로가 남편이 뭘 하고 싶은가 생각하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너무 남성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봤구나 생각이 들었다”며 “여성주의 시각으로 성 평등하게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 것은 엄청난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고 설명했다.

여성노동 가치 평등하게 향상되어야

이후 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법, 호주제폐지 제정까지 현장에서 줄곧 앞장서서 함께 해왔다. 여성의전화 활동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여성인권수호에 헌신하며, 자신도 성장했다.

“여성의 폭행 문제는 남성이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드는 사랑의 매도 마찬가지죠. 폭행당하는 상대방 입장에서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요.”

한편 그녀는 광주여성쉼터 소장을 맡으면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거의 24시간을 쉼터 여성들과 함께 하면서 생활을 들여다봤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폭행 후유증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생활하는 여성들에게 쉼터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설명을 한다. 치유 프로그램 등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꿈을 찾도록 돕고 있죠”라며 “6~9개월을 생활을 하면서 역량 강화하는 ‘제 2의 자궁’는 생각을 갖게 하고,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광주여성쉼터소장 직을 마무리 하고, 2013년부터는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현재도 그녀는 불합리한 판결 앞에 나서 싸우고 있다. 대부분 성폭행 피해자 여성이 저지른 사건은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 같은 일들이 쉽지는 않겠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 합심해서 가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봐요. 여성친화도시를 지향하는 광주도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 여성의 안전을 제일 먼저 담보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그녀에겐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여성들의 노동은 적은 가치로 매긴다는 것이다. 사회는 ‘돌봄, 가사노동’ 등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여성이 맡길 바라며, 낮은 가치를 매긴다.

이렇듯 염 대표는 “세상의 의식과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는 보람, 사명, 가치가 없는 것은 없지요”라며 “여성들의 노동을 적은 돈으로 착취하지 않고 남성과 평등한 가치를 매겨야 한다”고 사회변화가 더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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