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다시 돌아올 순 없나요...”
“여보, 다시 돌아올 순 없나요...”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1.06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대 시간강사 자살 그 후 유가족
지도교수와 대학측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청구

▲서 박사의 유가족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는 지난 5일 조선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따뜻한 밥상 한 번 제대로 차려주지 못하고 보낸 것 같아............”

지난 2010년 대학임용비리, 논문대필 의혹을 폭로하고 목숨을 끊은 서정민 박사의 아내를 지난 5일 조선대 정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한참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보통 평범한 가정처럼 남편, 아들, 딸 네 명이서 평범하게 한 상에 모여 밥 한 끼를 먹고 싶어도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유가족들은 초겨울 추운 날씨에 거리로 나섰다. 관련 지도교수와 대학 측의 공식적인 사과 및 처우개선 의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정민 박사의 아내
돈벌이 안 되던 시간강사 아내와 맞벌이

서정민 박사의 유가족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는 5일 조선대 정문에서 지도교수와 조선대를 상대로 손해배상 5억 원을 청구하고, 처우개선과 논문대필의 진상 재조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1인 시위를 하던 서 박사의 아내는 남편을 여의고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듯 화장기 없고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피켓을 들고 있었다.

한참동안 피켓을 들고 있던 서 박사의 아내가 잠시 자리에 앉아 쉬는 틈을 타 기자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 오셨냐는 질문 한마디에 서 박사의 아내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이야기를 털어놨다.

“남편은 젊은 나이에 일찍부터 강의를 나갈 수 있게 돼서 늘 뿌듯해하고 자랑을 했어요. 하지만 시간강사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기엔 넉넉하지 못한 벌이를 해서 저도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책을 놓지 않고 살던 남편을 뒷바라지했었지요.”

“언제부턴가 남편의 입에선 계속 머리가 아프다는 말만 나왔어요. 그러다 스트레스로 몽땅 이가 쏟아져 40대의 나이에 틀니를 하게 됐지요. 심지어 명절에도 논문을 써야 한다고 학교에만 살았던 남편이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한참 또래 애들처럼 평범하게 취업준비를 했었을 나이인 서 박사의 아들(26세)도 그늘 진 얼굴로 어머니 옆 자리에 서있었다.

▲논문대필, 교수임용비리를 폭로하고 생을 마감한 서정민 박사의 아들(왼쪽)과 아내(오른쪽)
아들, 아버지 잃은 충격으로 건강 악화

서 박사의 아들은 해군사관학교를 다녔다. 올해 3월 해군사관학교 중위로 제대한 아들은 “아버지는 늘 차에서나 집에서나 항상 책만 보며 사셨어요. 저도 아버지 곁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배웠죠. 아버지는 그렇게 늘 책을 붙들고 사셨어요”라고 생각을 정리하며 말 한마디를 힘들게 말했다.

명석하고 늠름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 뇌수막염 등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방금까지 경험했던 일들을 메모를 하지 않으면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늘 손에 펜을 쥐고 있는 없던 습관이 생겼다.

서 박사의 아내는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신체 건강했던 아들마저 이렇게 되고 나서 가슴이 미어져요. 아들은 그 이후로 제 옆에 두고 챙기면서 함께 다니고 있어요. 더 이상 광주에 살기 싫다던 딸(23세)은 부산에 있는 학교로 떠나게 되고...”라며 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 박사의 마지막 사랑인 아내는 20살 무렵 서울에서 우연히 서 박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가방 하나와 팬티 한 장을 들고 서울로 상경했던 남편이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열심히 살던 모습은 검소하면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고 한다.

검소한데다 불의를 보면 못 견디는 성격을 지녔다던 남편은 1993년 성균관대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게 됐고, 조선대 영어영문과 석사(1997), 박사(2002)학위를 취득하고 1997년부터 조선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기 시작했다.

10여 년 동안 수없이 논문 쓰다 힘겨운 생 마감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던 그녀의 남편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를 분석하여 논문을 쓰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서 박사는 10여년 가까이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뒤로한 채 논문 쓰는 일에만 몰두하게 됐다. 서 박사가 쓴 논문에 지도교수는 이름만 올리기 일쑤였다. 그는 논문을 쓰는 ‘논문 대필 기계’가 되고 있었다.

결국 숨 돌릴 틈도 없이 수많은 논문을 썼던 서 박사는 10여 년 동안 쓴 논문이 대략 54편이라고 유서를 남기고, 지난 2010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유서에 따르면 지도교수와 함께 쓴 논문 25편, 함께 발표한 논문 20편, 지도교수 제자를 위해 쓴 논문 박사 1편, 학진 논문 1편, 석사 4편 등)

밝혀진 유서에는 ‘한국의 대학 사회가 증오스럽다. 지도교수는 논문을 쓸 때 수시로 이용하고, 더 이상 종의 가치가 없으니 버리려 한다. 교수 한 자리에 1억 5000만원, 3억이라는 제의를 두 번이나 받았다’는 등 지도교수의 논문대필 관례, 한국 사회의 대학교수 임용비리가 낱낱이 쓰여 있었다.

이처럼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조선대 시간강사였던 서 박사는 지난 2010년 5월 25일 교수임용비리와 논문대필을 세상에 폭로하고 자신의 집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힘겨운 삶을 마감해 주의를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당시 학교 측은 공동연구라 진상조사를 하고 그 조사를 토대로 경찰 측은 ‘혐의 없음’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처우개선이나 지도교수의 사과 한 마디를 받지 못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일 서정민 박사의 유가족과 담당 변호인은 광주지법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과보고를 했다.
재조사 통해 사립대학 교수 문제 해결돼야

3년 만에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겠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 박사의 아내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직장까지 찾아와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 박사의 아내는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며 “남편의 유서에 남긴 것처럼 헛되지 않게 진실만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한편 기자회견이 끝나고 서 박사의 유가족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는 지도교수와 대학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같은날 광주지법 654호 조정변론실을 방문해 변론준비기일에 참석했다.

이번 민사소송을 계기로 새롭게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소송에서 핵심쟁점은 ‘논문대필’ 사실관계 여부에 있다.

서 씨의 유족측 변호인은 “조사를 받아야 할 가해자 집단이 내놓은 조사 보고서를 가지고 ‘혐의없다’는 수사결과가 나온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번 계기로 총체적으로 시간강사 제도를 포함한 사립대학 교수 문제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이번 소송을 시작으로 지도교수, 조선대 측과 서 박사 유가족 측의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김다이 기자

▲서정민 박사가 자필로 직접 쓴 유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